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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조 호남팹 투자' 발표 후…기업 '신중'·정부 '속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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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반도체 공장 투자 계획 내놓은 '삼전닉스'
일단은 800조 숫자만…'추후 판단' 여지 남겨
인프라 확신 필요한데…빠른 추진 강조하는 정부
"팹 건설 타임 테이블은 기업이 짜야" 목소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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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호남권에 새로운 반도체 공장(팹)을 짓기 위해 '800조 원'을 투입하겠다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정부와 협의를 거쳐 일단 발표했지만, 이에 대한 세부 시간표나 부지선정 등에는 신중한 접근법을 택하고 있다.

팹 건설은 치열한 글로벌 반도체 경쟁 구도에서 우열을 좌우할 수 있는 핵심 사안인 만큼, 정부가 약속한 인프라 지원의 현실화 여부를 면밀하게 살핀 뒤 행동에 나서려는 기류다. 그러나 정부는 용인과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동시 추진론을 언급하는 등 지역 균형 발전을 명분 삼은 '속도전'을 강조하는 모양새여서 기업으로서는 경영 판단의 여지가 줄어들 수 있다는 의견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온다.

삼성·SK, 800조 호남 팹 신설 계획 발표 후…'신중 모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달 29일 청와대에서 이재명 대통령 주재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 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 참석해 총 1558조 원 규모의 지방 투자 계획을 내놨다. 특히 두 기업은 각각 400조 원씩 총 800조 원을 투입해 호남 지역에 전(前)공정 팹 4기를 짓겠다는 구상을 소개했다. 정부는 관련 인프라 구축을 위한 정부 차원의 전폭적 지원을 약속했다. 이 대통령은 "기업이 국가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서 활동할 수 있다는 점을 확실히 증명했다"며 이 회장과 최 회장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들 기업은 AI(인공지능) 기술 고도화와 맞물린 메모리 반도체 수요 폭증에 대응하기 위해 수도권을 넘어 호남에 팹을 신설하는 계획을 세웠다고 설명했다. 이는 기업이 자발적 판단을 통해 내린 결론이라는 정부 설명과도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비용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한 후(後)공정 팹 구축이 애초 중점적으로 검토되다가 전공정 팹 구축으로 기류가 급반전된 건 청와대와 여권의 요구가 반영된 결과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실제로 이번 국민보고회를 앞두고 호남 지역 정가를 중심으로 후공정보다 전공정 팹이 들어서야 한다는 구체적 요구가 나오기도 했다.

이렇게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액을 일단 공표한 이후 기업들은 관련 계획을 구체화하는 데에는 신중한 자세를 유지 중이다. 삼성전자는 호남 팹 부지와 관련해선 광주를 "후보지로 계획"하고 있다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력과 용수, 인력 확보·양성, 정주 여건 등 많은 인센티브 지원이 기대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삼성전자는 국민보고회 당일 호남 팹 구축을 포함한 '2026~2040년 국내 투자 비전' 공시를 통해 "이 같은 중장기 투자 계획은 현재 시황에 근거한 장래 계획으로 이해를 돕기 위해 제공하는 가이드라인"이라며 "향후 시장 상황과 당사 경영 환경 변화에 따라 변동될 수 있다"고 밝혔다. 원래 "해당 (투자) 규모와 일정은 추후 변경될 수 있다"고 공시했다가 추가 설명까지 덧붙이며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은 셈이다. 

SK하이닉스 역시 이번 투자 계획에 대해 삼성전자와 비슷한 취지로 공시했으며, 팹 부지와 관련해서는 '서남권'이라고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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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용인·호남팹 동시 추진론'으로 속도전…"기업 판단에 부담" 우려도

두 기업은 이튿날 정부 주도로 광주에서 열린 투자협약식에서도 국민보고회 발표 수준의 계획을 유지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투자협약식 직전 열린 광주 현장 국민보고회에서 이 회장과 최 회장을 거론하며 "원래는 (현재 건설 중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다 끝내고, 그다음 단계로 여기에 투자하려 했던 것 같더라"라며 "그래서 제가 (두 회장에게) 반도체 수요가 너무 폭증하니까 동시에 추진하자고 말씀을 드렸다"고 했다. '용인·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동시 추진론'을 직접 언급한 것이다.

이를 두고 기업 판단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한 반도체 학계 교수는 "팹 건설에 대한 타임 테이블은 정부가 아니라 기업이 글로벌 경쟁 상황 등을 고려해 신중하게 짜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여태까지 삼성과 SK가 내놓은 투자 계획 관련 발표 내용을 종합하면, 팹 건설은 전력·용수·인력·부지 등 핵심 인프라와 우호적 시장 환경 등 여러 요건이 맞아떨어졌을 때 이뤄지는 중요 경영 판단 사항인 만큼 이들 기업은 일단 정부의 지원책이 보다 구체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을 이끌고 있는 전영현 DS부문장도 광주 행사에서 "안정적 전력 공급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해야 한다"며 "원전 확대와 전력구매계약(PPA)을 적극 추진하고, 액화천연가스(LNG) 열병합 발전도 반드시 추진될 수 있도록 다시 한번 부탁드린다"고 정부에 당부했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 역시 "대규모 부지에 안정적인 전력과 용수 공급이 가능한 입지가 저희에게는 필요하다"고 했다.

정부 지원 구체화 기다리는 기업들…전문가 "아직 막연한 수준"

정부는 일단 '전폭 지원'을 약속하며 개략적인 대책들을 내놨지만, 초대형 프로젝트를 뒷받침하기에는 아직 불확실성이 크다는 평가가 많다. 일례로 정부는 호남권 팹 4기를 가동하려면 6.3GW(기가와트) 규모의 전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적기에 차질 없이 공급하도록 하겠다"며 재생에너지와 원전 활용 등을 대책으로 제시했다. 더 세밀한 수요 전망과 발전원 구성 등은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반영할 예정이라는 설명이다.

6.3GW는 대형 원자력 발전소 4.5기 설비용량과 맞먹는 규모다. 현재 호남권에는 한빛원전이 가동 중이지만 작년 말에 1호기는 설계수명 만료로 가동 중단됐고, 2호기도 올해 9월 같은 이유로 가동이 멈출 예정이다. 나머지 3~6호기도 2034년부터 순차적으로 수명 만료기가 도래한다. 호남 지역은 재생에너지가 풍부하기는 하지만, 날씨와 시간대에 발전량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를 보완할 저장장치 등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 진단이다. 팹 가동을 위해서는 안정적 전력 공급이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원자력 공학계의 한 교수는 "한국의 원전은 동해 쪽에 집중돼있다. 원전을 가동하려면 대량의 물이 필요한 만큼 수심이 깊은 동해에 집중된 것"이라며 "동해 원전의 전기를 호남 팹에 끌어다 쓰는 건 물론 가능한데, 문제는 앞으로 늘어날 필요 전력량을 감안하면 이미 포화 상태인 송전망의 확충이 필수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지역민들의 다양한 갈등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재생에너지를 팹에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필요한 ESS(에너지저장장치) 규모도 상당할 것"이라며 "치밀한 계획이 필요한 시점인데, 발표된 정부 지원책만 놓고 봐서는 아직까지는 막연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이번에 발표된 메가 프로젝트에는 2035년까지 전국 곳곳에 총 18.4GW 규모의 AI 데이터센터를 짓겠다는 내용까지 포함된 만큼, 이 모든 추가 필요 전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등에 대한 명확한 청사진이 제시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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