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화천군의 새벽은 유난히 고요하고 깜깜했다. 소리 없이 반짝이는 별들 아래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들만이 이 새벽을 채우고 있었다.
적막이 깨진 건 9일 새벽 4시쯤이었다. 숙소에 모여 있던 '2026 통일걷기' 참가자 30여 명은 잠옷을 활동복으로 재빠르게 갈아입고 두 눈을 비비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전날 수십 킬로미터를 걸은 탓에 밤 9시쯤 곯아떨어졌던 이들은 "잘 잤냐. 개운하다"며 서로 아침 인사를 나눴다.
북한과 맞닿은 비무장지대(DMZ)를 눈앞에 둔 이곳에서 참가자들은 다 함께 큰 소리로 "화이통!"(화이팅+통일)을 외치며 통일걷기 8일 차 여정을 시작했다.
"무더위 힘들지만 뿌듯"…자연 절경 '예술'
9일 오전 5시 '2026 통일걷기' 참가자들이 8일 차 일정을 시작하며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김하영 수습기자2017년 시작한 통일걷기는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민간인 출입통제선을 따라 걸으며 평화와 통일의 길을 만들자는 취지로 시작됐다.
올해 참가자들은 지난 2일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를 출발해 오는 14일 경기 파주 임진각까지 약 300㎞를 걸은 뒤 12박 13일 일정을 마무리한다.
이날은 화천에서 철원으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이날 첫발을 뗀 참가자들은 선선해진 날씨에 "바람결이 다르다. 가을 느낌이 물씬 난다"며 반색했다.
전날까지 이어진 이른바 '역대급 불볕더위'에 몸 곳곳에 땀띠나 습진이 생기고 햇빛에 화상을 입는 등 고생했던 터라, 선선해진 날씨가 더욱 반가웠다.
9일 오전 6시 '2026 통일걷기' 참가자들이 강원 화천군 마현리 인근을 걷고 있다. 김하영 수습기자올해 통일걷기 최연소 참가자 양하람(17)군은 "(전날) 너무 땡볕에서 걸어서 더위를 심하게 먹었다. 살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3년 전 14살 때 참가했을 때도 '정말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었지만, 완주하고 나니 참 뿌듯하고 좋은 기억이었다. 올해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며 웃었다.
다행히 이날부터 화천의 아침 기온은 19도 안팎까지 내려갔다. 바람만 살짝 불어도 시원한 날씨에 참가자들의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이번 행사 완주에 도전하고 있는 60대 황춘길 씨는 "첫날엔 너무 덥고 몸도 적응이 안 돼 힘들었는데, 오늘은 날씨가 선선해서 걸을 만해 다행"이라고 말했다.
평생 건설회사에서 일하다 최근 은퇴한 황씨는 "30년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나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며 "이번 행사에서 자연경관을 보고 걸으며 나 자신에 대한 생각정리를 할 기회가 많았다"고 말했다.
걷는 내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자연이 만들어낸 풍경이었다. 특별한 장소가 아니어도 길은 온통 풀과 나무로 가득했고, 짙은 초록빛이 마음을 안정되게 했다. 대낮부터는 우렁찬 매미 소리가 숲에 생기를 더했고, 중간중간 피어난 형형색색의 꽃들과 방아깨비·벌·나비 등 곤충들도 발걸음에 생기를 더했다. 구렁이 허물과 살아 움직이는 독사, 울타리에 들어선 벌집 등 도심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도 눈앞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특히 이날 걸을 예정인 용양보는 통일걷기 코스에서도 손꼽히는 절경이다. 본래 농업용수를 공급하던 저수지였던 용양보는 DMZ 안에 포함된 이후 자연습지로 자리 잡았다. 호수 위로는 오래된 출렁다리가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흔들리고, 그 위에는 검은색 가마우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날 해설을 맡은 국립생태원 보호지역팀 서형수 박사는 "생태 보존이 참 잘 돼 있는 곳이라서 학자로서 의미가 깊었다"고 말했다.
9일 오전 11시 30분 '2026 통일걷기' 참가자들이 강원 철원군 암정교를 보기 위해 논밭 옆을 걸어가고 있다. 김하영 수습기자통일 염원하며 걸어…"총소리 아닌 짐승소리 듣고파"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는 것도 여정의 즐거움이었지만, 분단의 선을 따라 걷는 이들이 가장 많이 떠올린 것은 '통일'이었다.
참가자 유순금(69)씨는 "걸으면서 '통일은 언제쯤 될까'라는 생각을 가장 많이 한다. 하루빨리 통일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씨는 따로 챙겨온 하모니카로 여정 중 '아리랑'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을 연주하기도 했다.
연주를 들은 다른 참가자들은 "낭만적이고 감동적인 순간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유씨는 "이 행사에서 통일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하모니카를 연주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2017년부터 매년 참가해 벌써 10번째 통일걷기 대장정에 나섰다는 생태 작가 김담(60)씨는 "10년 새 아이들은 모두 자라고 어른들은 늙었다"며 "곧 통일이 되길 염원한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강원 고성군에 살았다는 그는 "난 포사격 소리에 익숙하다"며 "이번 걷기 대회 중에도 강원 군부대 인근을 지나며 대포소리와 총소리가 많이 들렸는데, 앞으로는 이 숲 속에서 전쟁의 소리가 아닌 새와 짐승의 소리가 들리는 세상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고 전했다.
의료지원 자원봉사를 나온 대한간호협회 소속 김수민(26)씨는 "통일이라는 게 (참가자들) 개인의 이익을 위한 일도 아닌데, 팔다리 통증까지 참아가며 걷는 모습이 존경스럽다"며 "요즘 제 또래들은 통일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는 분위기인데, 이번 기회로 하루빨리 통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9일 오전 11시 '2026 통일걷기' 참가자들이 화이통을 외치며 암정교를 보기 위해 용양리 도로를 걷고 있다. 김하영 수습기자"한 사람 한 사람 걸음이 모여 세상 바꾼다고 믿어"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의원은 매일 행렬 뒤쪽에서 참가자들과 함께 걷는다. 그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통일로 가는 길은 어쩌면 조금 멀어져 가는 것만 같다"며 "그래도 걷는 과정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보며 더 품격 있는 인간으로 살게 된 것 같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번 행사는 사단법인 '통일걷기'와 CBS가 공동으로 주관하고 이 의원 등 국회의원 95명이 공동주최했다.
끝없이 걷던 참가자들에게도 중간중간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고된 일정을 함께 보내며 이들은 어느새 친구가 됐다. 참가자들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자신들의 간식과 음료를 서로 나눴다. 언덕길을 오르느라 굳어 있던 얼굴에도 통일을 염원하는 외침 "화이통!" 한마디에 미소가 번졌다.
능선을 넘어 북쪽을 바라보던 김담씨가 말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걸음이 모여 세상을 바꾼다고 믿습니다. 혼자 걸으면 작은 길이지만, 여럿이 걸으면 큰 길이 만들어집니다. 지류가 강물을 이루고 바다로 흘러가는 것처럼요. 저는 여전히 그 길을 따라 백두산까지 걸어가는 꿈을 꿉니다."
통일을 염원하며 하나 된 이들은 오는 14일 파주 임진각까지 계속해서 걷고 또 걷는다.
9일 오전 '2026 통일걷기' 참가자들이 햇볕을 피해 그늘 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김하영 수습기자영문기사 보기 (View English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