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1974년). 연합뉴스박정희 유신정권 당시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과거 국가배상 소송의 확정판결을 넘어 다시 재판받을 길이 열렸다. 피해자들의 민사재심을 허용하는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다.
반면 간첩조작이나 불법구금·고문 등 다른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여전히 과거 확정판결에 가로막혀 있다. 같은 국가폭력 피해자임에도 피해 유형에 따라 재심 기회가 달라지면서 형평성 문제가 제기된다.
긴급조치 피해자는 확정판결 넘어 재심 가능해져
3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국회는 지난달 20일 본회의에서 '긴급조치 피해자 민사재심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유신정권의 긴급조치로 피해를 입었지만 과거 국가배상 소송에서 각하 또는 기각 판결이 확정된 피해자들에게 다시 재판받을 기회를 주는 내용이다.
긴급조치는 박정희 정부가 유신헌법에 따라 발동한 비상조치로, 유신헌법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행위 등을 금지하고 위반자를 처벌하는 데 활용됐다.
이번 특별법이 마련된 배경에는 같은 긴급조치 피해자 사이에서도 국가배상 여부가 엇갈리는 문제가 있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22년 8월 긴급조치 9호가 위헌·무효라며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쪽으로 기존 판례를 변경했다.
당시 국가배상 소송이 진행 중이던 피해자들은 바뀐 판례를 적용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판례가 바뀌기 전에 이미 패소가 확정된 피해자들은 다시 배상을 청구하기 어려웠다. 확정판결의 판단을 뒤의 소송에서 다시 다툴 수 없도록 하는 이른바 '기판력'에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이번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대법원의 판례 변경 이전에 패소가 확정된 긴급조치 피해자들도 다시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특별법의 적용 대상은 긴급조치 피해자로 한정된다. 과거 간첩조작이나 불법구금·고문 등 다른 국가폭력 피해자 가운데 국가배상 소송에서 이미 패소가 확정된 이들에게는 여전히 확정판결을 다시 다툴 별도의 제도적 통로가 없다.
43년 만에 '무혐의'인데…과거 패소 판결에 막힌 국가배상
재일동포 김병진씨 사건은 긴급조치 이외의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연세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김씨는 1983년 7월 영장 없이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됐다. 보안사는 김씨가 일본 유학 시절 재일동포 간첩으로 지목된 인물에게 사상교육을 받고 지령을 받아 귀국한 뒤 국가기밀을 수집했다고 의심하고 김씨를 3개월간 불법 구금한 상태에서 수사했다.
그리고 검찰은 김씨에게 공소보류 처분을 내렸다. 공소보류는 혐의가 인정된다는 것을 전제로 기소를 미루는 처분이다.
이후 김씨 사건이 국가폭력에 따른 피해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9년과 2024년 두 차례에 걸쳐 김씨를 국가폭력 피해자로 인정했다. 서울중앙지검도 올해 5월 민간인 수사권이 없던 보안사가 김씨를 불법 구금한 점 등을 고려해 43년 만에 사건을 재수사한 뒤 혐의없음 처분을 내렸다. 검찰이 공소보류 사건을 직권으로 재수사해 무혐의 처분한 첫 사례다.
하지만 43년 만에 혐의를 벗었어도 과거 국가배상 소송의 패소 확정판결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긴급조치 피해자들과 달리 김씨에게는 국가폭력 피해를 이유로 확정판결을 다시 다툴 수 있도록 하는 별도의 특별법이 없다.
결국 김씨는 기존 법제도 안에서 확정판결을 넘어설 방법을 찾고 있다. 새로 제기한 국가배상 소송이 1심에서 각하되자 항소했고, 국가폭력 피해 사건에 과거 확정판결의 효력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헌법에 어긋난다는 취지의 사건도 헌법재판소에서 다투고 있다.
별도로 민사재심도 청구했다. 검찰이 과거 공소보류 처분을 취소한 것이 현행 민사소송법이 정한 재심 사유에 해당한다는 주장이다. 민사소송법은 확정판결의 근거가 된 재판이나 행정처분 등이 나중에 바뀐 경우 예외적으로 재심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김씨 측은 공소보류 처분 취소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간첩조작·불법구금 피해자 재심 법안은 국회 계류중
975년 4월 7~8일 고려대 시위대. 연합뉴스
긴급조치뿐 아니라 불법구금·고문 등 다른 국가폭력 피해자들에게도 재심의 길을 열어주는 법안은 이미 국회에 발의돼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준혁 의원이 지난해 8월 대표 발의한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안'은 반인권적 국가범죄 피해자 본인의 국가배상청구권에 소멸시효를 적용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과거 국가배상 소송을 냈다가 패소 판결이 확정된 피해자도 다시 재심을 청구할 수 있도록 했다.
법안이 통과되면 긴급조치 피해자뿐 아니라 간첩조작과 불법구금, 고문 등 다른 국가폭력 피해자들에게도 과거 패소 확정판결을 다시 다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하지만 해당 법안은 아직 국회에 계류돼 있다. 긴급조치 피해자들은 특별법 통과로 '기판력의 벽'을 넘어 다시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된 반면, 김씨와 같은 다른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개별 소송과 헌법재판 등을 통해 스스로 구제의 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법무법인 원곡의 최정규 변호사는 "긴급조치 피해자들에게 재심의 길을 열어준 것처럼 다른 국가폭력 피해자들도 과거 확정판결을 다시 다툴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국가폭력이라는 본질은 같은데도 긴급조치 피해 여부에 따라 권리 구제 가능성이 달라지는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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