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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코인을 샀을 뿐인데, 내 통장이 범죄에 묶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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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9-1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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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환 경감의 사기(詐欺) 프로파일링]

통장이 지급 정지됐다가 다시 풀린 사례. 금융감독원 자료. AI 생성 이미지통장이 지급 정지됐다가 다시 풀린 사례. 금융감독원 자료. AI 생성 이미지
금융감독원 자료에 의하면, KB국민·신한·하나은행 등 8개 주요 은행에서 통장이 지급 정지됐다가 다시 풀린 사례는 2023년 8,096건, 2024년 5,387건, 2025년 8,855건이였고, 2026년 상반기(1~6월)에만 9,682건으로, 올해 지급정지 발생 건수는 이미 전년도를 넘어섰다.

통장이 지급정지됐다는 것은 단순히 돈을 당장 찾지 못하는 불편함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급여를 받거나 생활비를 이체하고, 카드대금을 결제하는 평범한 금융생활 자체가 멈춰 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범죄에 가담한 사실이 없더라도 범죄자금이 자신의 계좌와 연결됐다는  이유만으로 내 모든 계좌가 지급정지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가상자산을 개인 간 직접 사고파는 이른바 '장외거래'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보이스피싱 등 각종 피싱 범죄자금과 연결되는 사례까지 발생하고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서울에 사는 40대 회사원 이모씨도 그랬다. 이 씨는 9월 해외여행을 앞두고 여행 경비로 사용할 테더(USDT)를 구입했다. 테더는 미국 달러 가치에 연동돼 가격 변동이 상대적으로 작은 가상자산으로, 해외에서는 QR코드를 이용해 결제할 수 있어 여행객들이 이용하기도 한다. 이 씨는 정식 거래소가 아닌 텔레그램에서 테더를 판매한다는 사람을 알게 됐다. 거래 과정은 간단했다. 상대방이 알려준 계좌로 200만 원을 보내고, 약속한 테더를 전달받으면 끝이었다.

이 씨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 일은 그저 코인을 산 것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흘 뒤, 이 씨의 일상은 갑자기 멈춰버렸다. 은행 계좌가 지급정지된 것이다.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은행에 문의하고서야 이유를 알게 됐다. 자신이 테더를 구입하기 위해 돈을 보낸 상대방의 계좌가 보이스피싱 조직과 연결돼 있었던 것이다.

범죄자금이 여러 계좌를 거쳐 이동하는 과정에서 이 씨가 거래한 계좌까지 연결됐고, 결국 이 씨의 통장도 지급정지된 것이었다. 이 씨는 억울했다. "나는 보이스피싱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정상적으로 코인을 사고 돈을 보냈을 뿐입니다." 이 씨는 자신이 범죄와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거래 내역과 상대방과 주고받은 대화 내용 등을 제출하며 소명해야 했다. 결국 20일이 지나서야 통장은 다시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범죄자는 아니었지만, 범죄자금과 연결된 사람으로 의심받은 것이다.

    

피해자는 왜 상대방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이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 '텔레그램에서 모르는 사람과 거래했는데 왜 의심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실제 이 씨의 입장에서 당시 상황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씨는 코인으로 돈을  벌겠다는 욕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에게 투자를 권유받은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해외여행을 앞두고 환전을 하지 않고 현지에서 현금 대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충전용  코인을 구입했을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의 경계심이 무너진다.

우리는 위험한 상황이라고 판단할 때는 자연스럽게 주의를 기울인다. 하지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평범하고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면 경계 수준을 낮춘다. '코인을 사는 것뿐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 이러한 생각은 상대방에 대한 확인을 생략하게 만든다. 사기꾼은 바로 이런 심리를 이용한다.

범죄자는 처음부터 상대방에게 거액을 요구하거나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상적인 거래처럼 보이게 만들고, 상대방이 스스로 안심하도록 만든다. 가격을 알려주고, 거래 방법을 설명하고, 약속한 코인을 실제로 보내준다. 한 번의 거래가 문제없이 끝나면 사람은 상대방을 더욱 신뢰하게 된다.

심리학에서는 자신의 판단이나 행동이 옳았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경향을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한다. 처음부터 '이 거래는 괜찮다'고 판단한 사람은 이후에도 자신의 판단을 뒷받침하는 정보에 더 주목하기 쉽다. 상대방이 약속대로 코인을 보내주면 '역시 괜찮은 사람이었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거래가 정상적으로 진행됐다는 사실과 상대방의 자금이 깨끗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편리함'이 경계심을 낮춘다

장외거래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편리함이다. 정식 거래소에서 요구하는 본인 인증이나 계좌 연동 등의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되고, 개인적으로 원하는 상대방과 빠르게 거래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문제는 안전장치와 불편함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본인 확인 절차가 번거로운 이유는 이용자를 불편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거래 상대방과 자금의 흐름을 확인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추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그런데 사람은 이상하게도 불편함을 위험의 신호로 생각하기보다 제거해야 할 장애물로 생각할 때가 많다. '왜 이렇게 복잡하지?' '그냥 계좌로 보내면 되는 것 아닌가?'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거래한다는데.' 이런 생각이 쌓이면 안전장치를 하나씩 내려놓게 된다. 사기꾼에게 가장 좋은 환경은 바로 이것이다. 의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확인하는 과정을 귀찮아하는 사람이다.

이 씨와 같은 피해자가 사건 발생 이후 힘들어하는 것은 당장 내 계좌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자신이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범죄와 연결됐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과 억울함이다. '혹시 내가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은행이나 수사기관에서 나를 의심하면 어떻게 하지.'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문다.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은 사건이 끝난 뒤에도 자신을 자책하는 경우가 많다. '왜 그 사람을 믿었을까.' '조금만 더 확인했으면 알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피해자가 자신의 판단만 탓해서는 안 된다. 사기 범죄는 사람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범죄이기 때문이다.

범죄자는 피해자가 의심하지 않도록 정보를 조절하고, 필요한 만큼만 설명하며, 피해자가 스스로 '안전한 거래'라고 결론 내리도록 만든다. 따라서 사기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나는 절대 속지 않는다'는 자신감보다 '나도 판단을 잘못할 수 있다'는 겸손한 태도가 오히려 필요하다.

이승환 경감의 조언

지급정지가 된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공통적으로 이런 말을 한다. "제가  남을 속이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정상적인 거래를 했을 뿐인데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과거의 사기는 피해자에게 직접 돈을 보내도록 만드는 방식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피해자의 계좌나 가상자산 지갑을 범죄자금의 이동 과정에 끼워 넣어 피해자 자신도 모르게 범죄의 연결고리로 만드는 방식까지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가상자산을 거래할 때는 단순히 '얼마나 싸게 살 수 있는가'만 따져서는 안 된다.

누구와 거래하는지, 왜 정식 거래소가 아닌 개인 거래를 해야 하는지, 거래 과정에서 생략되는 안전장치는 무엇인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특히 SNS나 텔레그램 등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 직접 거래하면서 본인 확인이나 정상적인 거래 절차를 생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면 한 번쯤 멈춰서 생각해봐야 한다. 몇 천 원, 몇 만 원의 수수료를 아끼는 것이 거래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상적인 거래에서 불편함은 때로 안전을 위한 비용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억해야 할 것 있다.  '사기를 당하지 않는 것'과 '범죄에 이용되지 않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이다. 사기꾼은 나를 속여 돈을 빼앗을 수도 있지만, 내가 가진 계좌와 신뢰를 이용해 나도 모르는 사이 범죄의 통로로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는 모르는 사람에게 돈을 보내기 전 한 번 더 확인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이 사람이 나를 속이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거래를 통해 내가 모르는 범죄에 연결되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계좌 이체를 하는 경우, 확인할 수 없는 거래 앞에서는 잠시 멈추는 것이 필요하다.  그 짧은 멈춤이 때로는 이 씨의 경우 같은 200만 원의 피해를 막는 것을 넘어, 내 통장과 일상까지 지키는 가장 강력한 방어선이 될 수 있다.

이승환 경감(경찰청 치안정보국), '사기 프로파일링' 저자

※ 외부 필진 기고는 CBS노컷뉴스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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