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순천 '나무들의 밤'에서 열린 그래픽노블 '흰 신' 출간 기념 북토크에서 김금숙 작가가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박사라 기자 6년 전 순천에서 열린 북토크에서 한 시민이 김금숙 작가에게 물었다. 제주4·3 이야기를 하면서 왜 고향의 역사는 다루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김 작가는 언젠가 꼭 그리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관련 자료를 모으고 유족들을 만나며 준비한 이야기는 여순사건을 다룬 그래픽노블 '흰 신'으로 이어졌다.
지난 8일 저녁 순천의 복합문화공간 '나무들의 밤'. 김 작가는 '흰 신' 출간을 기념해 독자들과 만나 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풀어냈다.
김 작가는 "2020년에 처음 순천에 와서 전시와 북토크를 했는데 시민들이 굉장히 많이 모이셨다"며 "그중 한 분이 제주4·3 이야기를 하면서 왜 당신 고향 이야기는 안 하느냐고 물으셨다"고 회상했다.
이어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너무 놀랐다"며 "당장은 못 하더라도 언젠가는 꼭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때부터 책과 언론 기사를 모으며 조금씩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삶을 그린 '풀', 이산가족의 아픔을 담은 '기다림' 등 한국 현대사의 상처를 작품으로 그려온 김 작가에게 여순사건은 개인적인 아픔과도 맞닿아 있었다.
고흥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 여순사건을 겪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그 시절을 물어볼 사람들도 대부분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김 작가는 "어른이 되다 보니까 아버지가 어떻게 살았는지 너무 궁금한 거예요"라며 "왜 좀 더 살아계실 때 관심을 갖고 여쭤보지 못했나, 그거에 대한 후회도 '흰 신'을 하게 된 이유"라고 털어놨다.
작품을 준비하면서는 여수와 순천을 여러 차례 찾아 유족들의 증언을 들었다. 특히 김 작가가 귀 기울인 것은 그동안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들의 목소리였다.
그는 "유족들을 만나서 얘기를 듣다 보니까 여성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는 거예요"라며 "우리 어머님들을 어떻게든 만나야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만난 여성들 가운데는 가족을 잃은 뒤 어린 나이에 생계를 책임지고, 오랜 세월 상처를 안고 살아온 이들이 있었다. 김 작가는 이들의 증언을 작품 마지막 부분에 담았다.
지난 8일 순천 '나무들의 밤'에서 열린 그래픽노블 '흰 신' 출간 기념 북토크에서 김금숙 작가가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박사라 기자 증언을 듣는 과정에서는 이야기의 내용뿐 아니라 손짓과 표정, 주름과 옷차림까지 유심히 살폈다.
"그분들의 손 표정이라든지 주름이라든지 그런 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합니다. 그분들을 둘러싼 공기들, 먼지들, 음식들, 머리 스타일 같은 것들이 훨씬 중요할 수 있어요. 저는 그림으로 그것을 보여줘야 하니까요."
이날 김 작가는 직접 준비한 사진과 원화, 취재 자료를 화면에 띄우며 작품 속 장면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도 소개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이웃이 다른 이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장면이었다. 여순사건 당시 함께 살고 밥을 먹으며 지냈던 이웃의 손가락질 하나가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증언은 김 작가에게 큰 충격으로 남았다.
"같이 살고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웃었던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했어요. 손가락질 하나가 결국은 죽는 거예요."
그는 짧은 순간에 끝나는 손가락질을 무려 여섯 페이지에 걸쳐 그렸다.
"6초도 안 걸리지만 6페이지에 걸쳐서 그 장면을 그렸어요. 사람들이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것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담기 위해 군인들의 복장과 이동 경로, 사건이 벌어진 날짜와 시간 등을 확인했고,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두 손을 뒤로 묶는 자세를 직접 취해보기도 했다. 가족의 시신을 찾아 헤매는 장면에서는 손에 먹물을 묻혀 그림을 그렸다.
강연이 끝난 뒤에는 참석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한 참석자가 작품 제목인 '흰 신'에서 흰색이 갖는 의미를 묻자 김 작가는 작품 속 두 켤레의 신발에 얽힌 사연을 소개했다.
하나는 대학에 입학한 딸에게 아버지가 선물한 흰 운동화다. 다른 하나는 여순사건 당시 누나의 생일을 위해 준비했지만 끝내 전하지 못한 흰 고무신이다.
김 작가는 "흰색이라는 게 그때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상징적인 색깔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는 한 참석자는 역사와 기억의 중요성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털어놨다. 김 작가는 자신도 어린 시절에는 역사에 관심이 없었다며 아이들이 역사를 어렵게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답했다.
"우리가 그걸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야기하고 공부해야지 아이들도 우리를 보고 배웁니다. 어른들이 잘해야 되는 거죠."
여순사건의 수많은 이야기를 15장으로 구성한 기준을 묻는 질문에는 부모 세대의 진실을 알고 싶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자식 세대의 이야기를 중심에 뒀다고 설명했다.
"앞부분은 자식 세대잖아요. 자식 세대가 부모 세대 이야기를 알고 싶어서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잖아요. 진실을 알고 싶어서 그런 거죠."
흰 신: 여순항쟁 이야기. 창비 제공 독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메시지를 묻자 "그것은 독자님들의 몫"이라며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질문하는 것, 그게 최고인 것 같다"고 답했다.
김 작가는 '흰 신'이 여순사건을 다룬 마지막 이야기가 아니라 또 다른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랐다.
"이것이 제가 '흰 신'을 통해 모든 분들의 이야기를 대표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이것이 시작이다. 이 이야기로 좀 더 많은 작품들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고흥 출신인 김 작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삶을 그린 '풀'을 비롯해 제주4·3을 다룬 '지슬', 이산가족의 아픔을 담은 '기다림', '준이 오빠', '내 친구 김정은' 등 다수의 작품을 펴냈다. '풀'로 2020년 미국 하비상 최우수 국제도서상을 수상했으며,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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