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CBS노컷뉴스 취재진이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의 이민청 앞에서 그곳에 수감돼 있던 구인혁(35)씨와 영상통화를 갖고 있다. 취재진은 구씨와 면회를 시도했지만 거절당했고, 영상통화를 가질 수 있었다. 남성경 크리에이터"하루 12시간 일했습니다. (온라인 스캠) 대본을 못 외우면 전기고문을 해요. 매일 같이 당했습니다. 반년 가까이 24시간 내내 발이나 손에 수갑을 차고 생활했어요. 잘 때도요. 중국인 한 명이 도망가다가 잡혀서 죽기도 했어요."
캄보디아에서 겨우 연락이 닿은 범죄단지(웬치) 감금 피해자 구인혁(35. 가명)씨가 전한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현실 세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일까, 쉬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웬치에 갇혔던 대다수의 피해자들은 비슷하거나 더 끔찍한 경험들을 했다고 전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사람을 납치해 가두고 다른 사람을 속이도록 한다는 이야기, 그 안에서 고문과 살인까지 벌어진다는 이야기. 영화가 아닌 현실이었습니다.
CBS노컷뉴스 취재진은 한국인 납치·감금 사태 취재를 위해 지난 15일부터 23일까지 총 9일 동안 캄보디아에 머물렀습니다. 수도 프놈펜과 남쪽의 해양도시 시아누크빌을 거점으로, 이른바 웬치라고 불리는 범죄단지를 비롯해 온라인 스캠 조직들이 과거 근거지로 삼았거나 지금도 머물고 있는 범죄현장들을 여럿 둘러봤습니다. 또 감금 피해자들을 비롯해 캄보디아 내 범죄 조직들의 생리를 잘 알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직접 얘길 들었습니다.
웬치(범죄 단지)로 지목된 시아누크빌의 한 건물 테라스에 외국인으로 보이는 남성들이 나와 있다. 남성경 크리에이터감금과 고문이 일상인 '웬치'
현지에서 마주한 범죄현장은 더욱 참혹했습니다. 우선 범죄 조직들이 존재하는 형태는 제각각 다양했습니다. 한산한 시골길에 교도소 같은 거대 범죄단지를 지어놓고 그곳에서 마치 공장처럼 온라인 사기를 벌이는가 하면, 도심 한가운데 평범한 아파트나 레지던스, 호텔 등에서 수십명이 소규모로 스캠 사기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범죄조직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도 합니다.
범죄단지가 대거 몰려 있는 시아누크빌이란 곳은 휴양지이자 카지노의 도시이기도 한데, 한 교민은 대다수의 호텔마다 스캠 사무실이 존재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라고 설명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공간 바로 근처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이렇게 많은 조직들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건 온라인 사기 규모뿐 아니라 거기에 동원된 납치·감금 피해자의 수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캄보디아 내 범죄 조직원의 수는 20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한국인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사기에 동원된다고 합니다. 한국인 대상 범죄만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현 상황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대부분 조직의 윗선엔 중국인들이 있다고 하는데요, 이들은 일반적으로 고수익 일자리로 사람들을 유혹해 캄보디아로 불러들인 뒤 온라인 사기 범죄에 가담시킵니다. 물론 또 적지 않은 이들이 범죄임을 알면서도 제발로 찾아가는 일도 있습니다. 달콤한 돈의 유혹도 잠시, 협조하지 않으면 때리고 전기충격기로 고문이 시작됩니다. 여러 경험담과 목격 등에 의하면 이같은 폭력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아주 흔한 일입니다. 시신을 처리하는 소각장까지 있다는 증언이 나오는 걸로 봐선 그 안에서 사람이 죽는 일도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라고 합니다.
가장 끔찍했던 건 인신매매가 숱하게 이뤄진다는 얘기였습니다. 인혁씨는 지인이 3천불에 자신을 범죄조직에 팔아넘기면서 지옥이 시작됐다고 했습니다. 범죄조직들은 서로 사람을 쉽게 사고 팔았습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온라인 스캠 규모가 크기 때문에 한국인의 몸값엔 '프리미엄'이 붙어 1만불에서 1만 5천불까지도 간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사람이 곧 돈이며 물건에 불과했습니다.
납치·감금 피해와 관련해 여러 다양한 사례를 접했지만, 쉽게 공개하기 어려운 얘기들도 있었습니다. 수위가 너무 높은 이야기도 있고, 남아 있는 이들의 안전 문제도 있습니다. 분명한 건 인격(人格)이 상실된 세상이 그곳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놈펜에서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거대 범죄 조직의 근거지인 태자 단지의 모습. 담장 위엔 빈틈 없이 철조망이 쳐져 있고, 곳곳에 CCTV가 설치돼 있다. 남성경 크리에이터모든 교민들 일제히 한목소리
이쯤에서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는 게 캄보디아 내 안전에 대한 문제입니다. 마침 캄보디아에서 만난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꼭 전달해달라는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캄보디아는 위험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캄보디아의 현지인들과 교민들은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 자체를 범죄 국가로 낙인찍지 말아달라'는 건데요,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온라인 스캠 집단의 범죄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는 분리돼 있다는 주장입니다. 거의 모든 경우가 중국인 등 외국인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며 아무런 상관 없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실제 취재진이 접한 대다수의 납치·감금 피해 사례들도 돈과 같은 특수한 목적이 범죄 조직들과 접촉하는 발단으로 작용한 게 사실입니다. 특히 교민들은 최근 몇 년간 일반 여행객이나 교민들 대상으로 납치·감금 사건이 벌어진 경우가 단 한 건도 없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는 지난 22일 캄보디아 현지에서 열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주캄보디아 한국 대사관이 확인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일각에선 교민들을 오해하는 일부 시각도 있습니다. 교민들이 지금까지 이 문제를 모른척해 왔다거나 축소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납치·감금된 여러 한국인들을 구출하는 일을 감당해 온 건 대부분 교민들의 몫이었습니다. 다수의 한국인 감금자들을 구조해 온 한 선교사는 한숨을 내쉬며 "오해하는 건 상관 없지만, 부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거짓말에 속아 이곳에 와서 피해를 당하는 일이 더는 없다면 좋겠다"고 부탁했습니다. 허황된 고수익 알바나 범죄임을 알면서도 찾아오는 일만 없다면, 캄보디아는 과거처럼 평온할 것이란 얘깁니다.
프놈펜에서 CBS노컷뉴스 취재진이 탄 오토바이 택시(툭툭)를 운전한 여성 운전수와 그녀의 아들이 카메라를 향해 밝게 웃어보이고 있다. 이원석 기자 '범죄도시' 된 시아누크빌, 원래는 석양 명소
캄보디아에 다녀온 이후 주변에서 '앞으로 다시 캄보디아에 가겠느냐'라고 묻습니다. 저는 주저 없이 '예스'라고 답합니다. 우선 현 시점에도 취재진이 캄보디아에 머무는 동안 범죄 조직을 직접 취재할 때를 제외하곤 안전상의 위협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다른 취재진들의 사정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현지인들로부터 삶의 여유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눈만 마주쳐도 눈웃음 지으며 손 들어 인사하는 그들로 인해 정신 없이 바쁜 일정 중 제게도 잠시 여유가 찾아오는 듯했습니다. 도움 요청에도 얼굴 하나 찌뿌리는 법 없이 손을 빌려주는 현지인과 교민들로 인해 늘 든든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아누크빌의 해변에서 현지인들과 여행객들이 석양을 바라보고 있다. 이원석 기자다양한 국가에서 온 여행객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많은 범죄 단지들이 둥지를 튼 시아누크빌과 보코산 등의 지역도 캄보디아 내에서 손에 꼽히는 여행지입니다. 취재진도 차이나타운에 몰린 어두운 범죄 단지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잠깐 시아누크빌의 해변과 마주쳤습니다. 석양이 바닷물과 백사장을 붉게 물들이는 시간에 세상 연인들과 가족들은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던 장면이 잊히지 않습니다.
현재는 납치 감금의 범죄지로 낙인 찍힌 채 일부 지역은 아예 여행금지 구역으로 묶인 캄보디아. 국제적인 온라인 스캠 조직들이 오염시킨 이곳이 하루빨리 예전 관광명소의 영광을 되찾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 더 안전한 국가를 만들기 위한 캄보디아 정부의 노력은 물론, 가해자를 이곳으로 밀어낸 국가들의 노력 또한 모아져야 할 것입니다. '경이의 왕국(The Kingdom of Wonder)'이라는 별칭을 다시 회복하는 때, 그때는 이곳 캄보디아의 도시와 해변에 가족들과 함께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