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주 기자하루 앞으로 제21대 대통령 선거에서 주요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 가운데 노동 공약보다 각자의 이념 성향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공약 분야도 드물 것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측은 지난달 28일,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이에 앞서 같은 달 26일 공약집을 내놓았고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는 30일에 공약집을 발표했다.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공약집 발행 계획 없이 온라인에서 공약을 공개하고 있다.
공약집 등에서 이들의 노동 공약을 살펴보면 이재명 후보와 권영국 후보는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에 초점을 맞추되 속도 차이가 뚜렷했다. 김문수 후보는 기존 노동관계 법·행정 체계를 재정비해 실질적인 변화를 누리도록 하겠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다만 대부분의 주요 후보들이 기존 법 체계로는 보호할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현행 노동시간 제도를 대거 개편해야 한다는 데에는 큰 틀에서 인식이 같았다. 반면 이준석 후보는 대부분 다른 공약에서 간접적으로 언급할 뿐, 노동 분야에 대한 공약 자체를 찾기 어려운 수준이다.
근로기준법 확대·노란봉투법·임금체불 ZERO 등 겹치는 공약들…실현 가능성 높을 듯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까지 모두 제시한 공통 공약으로 '5인 미만 사업장에 근로기준법 적용'이 있다. 지난 총선에도 여야 모두 근로기준법을 확대적용하겠다고 강조해왔던 터다.
현행 근로기준법에는 상시 근로자 수 5인 미만 사업장에 법령 중 일부만 적용하도록 하고, 구체적인 적용범위는 시행령에서 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5인 미만 사업장은 연장·야간·휴일근무수당이나 연차공휴일 유급휴가, 부당해고 금지, 직장 내 괴롭힘 금지 등 주요 규정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이재명 후보와 김문수 후보는 단계적 확대 적용을 약속하고 있다. 더 나아가 권영국 후보는 이미 법에 보장된 노동자의 권리인 만큼 즉각 전면 보장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이재명 후보와 권영국 후보가 내놓은 이른바 '노란봉투법', 노조법 2·3조 개정안도 주목되는 공약이다. 사용자 정의를 확대해 불필요한 노사 분쟁을 줄이고, 노동자를 향한 무분별한 보복성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아 노사 갈등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법이다.
비록 2023년 윤석열 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바람에 불발됐지만, 이미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으며 사회적 공감대를 이뤘던 바 있다. 따라서 두 후보 중 하나가 당선될 경우 무난히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또 공교롭게도 '임금체불 ZERO'라는 구호를 이재명 후보와 김문수 후보 모두 똑같이 공약집에 담은 점도 눈길을 끈다.
특고·플랫폼·프리랜서·자영업자 등도 노동 보호망 안으로
최근 산업·노동시장이 재편되면서 기존 법 체계로 보호할 수 없어 사각지대에 놓인 '일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공약들도 눈여겨볼만 하다.
자영업자나 특수고용노동자(특수형태근로자, 특고), 플랫폼 종사자, 프리랜서 등에 대해 이재명 후보는 '일터 권리 보장을 위한 기본법'을, 김문수 후보는 '노동약자보호법'을 각각 제시하고 있다.
김문수 후보의 노동약자보호법은 이처럼 기존 노동자로 포괄하기 어려운 이들을 '노동약자'로 묶어 계약분쟁 조정 지원, 경력 관리, 공제회 설립 등을 지원하겠다면, 이재명 후보는 더 나아가 산업재해나 직장 내 괴롭힘 등으로부터 보호하고, 4대보험 보장, 모성보호 등을 보장하겠다는 적극 보장하겠다는 온도차가 있다.
이에 대해 권영국 후보는 이러한 구분 자체가 노동자 아닌 존재로 낙인찍을 위험이 있다고 보고, 기존 노동자와 구분없이 기존 근로기준법의 보호망 안에 넣도록 법 개정에 나설 계획이다.
아울러 이재명 후보와 권영국 후보는 '근로자 추정 제도'를 내놓았다. 사측과 분쟁이 발생했을 때 당국은 이들을 우선 근로자로 추정하고, 근로자가 아니라면 이를 기업이 입증하도록 책임을 맡기는 내용이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을 모든 일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개편한다는 공약 역시 이재명 후보와 권영국 후보의 공통분모다.
이와 함께 이재명 후보는 정부 내 노동안전보건체계를 통합운영하는 등 예방·대응 체계를 강화하고, 자영업자까지 산재보험 보호대상에 포함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재해조사가 길어질 경우 산재 보험급여부터 우선 지급하는 등 국가책임을 강화하겠다는 계획이다.
권영국 후보는 사업장 규모·업종마다 달리 적용되는 산업안전보건법·중대재해처벌법을 전면 적용하고, 노동자들의 작업중지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겠다고 강조했다. 또 특고, 플랫폼 종사자, 프리랜서 뿐 아니라 자영업자, 농어민까지 산업안전보건법을 적용하고, 공무원·교원에도 감종노동 보호 조항을 확대 적용하겠다고 약속했다.
반면 김문수 후보는 중대재해처벌법을 크게 손보겠다는 입장이다. 사전예방의무 소홀에 대해서도 제재하되 처벌 수준을 완화하고, 특히 50인(50억 원) 미만 사업장에 대한 안전보건확보 의무를 완화해 부담을 덜겠다고 밝혔다.
주5일제 넘어 주4일제 향해…실현 가능성은 아직 미지수
스마트이미지 제공주52시간제가 정착된 가운데 노동시간을 더욱 줄이기 위한 이재명 후보의 주4.5일제, 권영국 후보의 주4일제도 주목받고 있다.
이재명 후보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이하 수준으로 노동시간을 낮추기 위한 로드맵을 제시하고, 주4.5일제 시범사업을 실시해 노동시간을 줄이겠다고 밝혔다. 장기적으로는 주4일제로 나아갈 계획이다.
권영국 후보는 '몰아서 일하기' 없는 주4일제를 도입하되 하루 11시간 노동시간 상한제, 24시간 내 11시간 연속 휴식제도 도입 등으로 노동자 건강권을 보장하겠다는 원칙을 함께 강조했다. 또 두 후보 모두 장시간 노동의 주범으로 꼽히는 '포괄임금제'를 금지하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주40시간제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현행 노동시간 제도와 격차가 큰데다, 단시간 노동의 기준인 주35시간까지 침범할 수 있어 단시간 안에 노동시간을 이처럼 급격히 단축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김문수 후보 역시 주4.5일제를 제시하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노동시간의 상한선을 줄이는 대신, 기존의 유연근무제 사용 요건을 완화해 '실질적인' 주4.5일제 효과를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또 현행 주52시간제에 대해서도 연장근로 사용 기간을 최소 반기 이상으로 확대하고, 관리단위를 최대 1년까지 확대해 몰아서 일하고 쉴 때 쉬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앞서 윤석열 정부 시절 '주69시간제 논란'이 재연되지 않으려면 노동시간의 총량을 축소하고, 연장근로를 노동자가 얼마나 자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보장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
노사관계에서 한층 더 뚜렷하게 갈라진 이재명·권영국 후보와 김문수 후보
이러한 노동 정책 변화를 뒷받침하기 위한 노사 관계에 대해서는 입장 차가 뚜렷하다.
이재명 후보는 초기업단위 교섭을 활성화하고, 노란봉투법 개정에 발맞춰 원하청 노사 교섭을 제도화하겠다고 밝혔다. 또 사업장 내 노사자율 협의를 주도할 '근로자(노동자)대표 위원회'를 상설화할 방침이다.
권영국 후보는 초기업(산별)단위 교섭을 제도화하도록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를 개선하고, 사용자단체 범위를 확대하거나 노동위원회가 교섭 단위를 결정하도록 한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았다. 또 노조 원하청 단체교섭 권리를 보장하고, 노동쟁의 범위를 확대해 '불법파업' 논란을 없애겠다고 밝혔다.
한편 김문수 후보는 대형 노조 등만으로는 포괄하기 어려운 소수의 노동자들을 대변하도록 '부분 근로자 대표제'를 제도화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노동조합의 불법 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부당노동행위를 제재하고, 건설현장의 불법행위를 근절하겠다고 강조했다. 윤석열 정부가 강조했던 '노사법치주의'를 연상케 하는 공약들이다.
이준석 후보, 노동 공약은 '최저임금 차등적용' 뿐?
이 외에도 이재명 후보는 △공공부문 노동이사제 전면 도입 추진 △지방공무원에 특별사법경찰권 부여 △노동분쟁을 전담하는 노동법원 설립 추진 △기업의 산재 실태를 보여주는 '안전보건공시제' 단계적 도입등도 주요 공약으로 볼 수 있다.
김문수 후보의 경우 △고령자 고용연장 추진 △직무 성과급제로의 임금체계 개편 △직장 내 괴롭힘 특별법 제정 △채용절차법을 보완한 공정채용법 제정 등이 눈에 띈다.
권영국 후보는 △최저임금 산입범위 원상회복 △초단시간 노동자의 연차, 유급휴일 적용 △자발적 퇴직, 65세 이상도 실업급여 지급 △노동시간 자유선택제·1년 최소 1개월 휴가제 도입 △월간 심야노동 횟수 제한 등 심야노동 단계적 폐지 △임금격차 해소 특별법 제정 및 국가임금격차 해소위원회 구성 △중대재해수사청 신설 등을 약속했다.
한편 이들과 달리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의 공약에는 사실상 본격적인 노동 공약은 찾기 어렵다. 단순히 노동조합이나 관련 주요 현안에 대한 공약을 내놓지 않은 것만이 아니라, 이준석 후보의 주요 지지층으로 꼽히는 청년들의 노동 현실에 대한 공약도 잘 보이지 않는다.
이준석 후보가 내놓은 거의 유일한 노동공약은 '지역 맞춤형 임금제'가 있다. 중앙정부가 최저임금 기준선을 정하면 30% 범위 안에서 지자체가 실제 최저임금을 따로 정하는 제도다. 각 지역마다 집값 격차 등이 커서 생활임금 차이가 큰 점을 고려해 최저임금을 달리 적용해야 공평하다는 얘기다.
다만 지역별로 아예 생활권이 분리됐거나, 역사적·문화적으로 오랜 기간 분리돼 지냈던 미국, 일본 등과 달리 단일 생활권을 이루고 있는 한국의 특성상 '저임금 지역' 낙인찍기를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수도권 등 임금이 높은 지역에 노동자가 몰리면 저임금 지역의 산업이 위축돼 지급능력이 낮아지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고, 여러 이유로 지역 이동이 어려운 이들만 어쩔 수 없이 낮은 임금을 감내해야 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기업의 리쇼어링(해외진출 기업의 국내 복귀)을 촉진하도록 최대 10년 동안 외국인 노동자에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겠다는 공약도 노동 공약의 범주 안에 넣을 수 있다. 다만 외국인 노동자에 최저임금을 차등적용하는 일은 근로기준법은 물론 헌법까지 개정해야 하는 사안인데다, ILO(국제노동기구) 국제협약에도 위배될 수 있어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인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이사장은 "과거에는 보수 정당도 노동계가 솔깃할 공약을 내놓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거의 없어서, 노동 공약으로 보기 어려운 수준의 얘기까지 하고 있다"며 "어느 때보다노 노골적으로 각 당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싶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