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한미국대사관 앞에서 열린 '2025 자주평화실천단 출정 기자회견' 참석자가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탈을 쓰고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황진환 기자이재명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을 성공적이었다는 여권의 '자평'이 이어지는 가운데 미국의 압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양국 정상은 관세 협상의 키였던 조선업 협력에 대해 공감대를 모았지만, 정작 상호 관세와 자동차 등 핵심 품목 관세 적용 시점을 두고 미국은 확답을 주지 않고 있다.
미국이 자동차 관세를 볼모로 수 조원대 규모의 금융 패키지 운용 방식을 두고 압박의 고삐를 죄는 가운데, 합의문 작성을 위해 방미(訪美)하려던 일본이 일정을 취소하면서 한·일 양국에 대한 미국의 압박 강도가 더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전략적 모호성이라지만…기업 부담은 누적
1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후속 협의를 둘러싼 '속도'를 놓고 대통령실과 부처 간 미묘한 온도 차가 감지된다.
대통령실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공동성명이나 공동합의문이 없는 데 대해 전략적으로 시간을 끌었다면서 양국 간 이견이 표출된 게 아니라는 취지를 강조하는 데 여념이 없다.
강훈식 대통령실 비서실장은 지난달 28일 기자간담회에서 "전술적으로 시간을 가지는 게 나쁘지 않다는 내부적 판단도 있다"며 "협상을 빨리 하는 게 유리하다는 근거는 별로 없다"고 강변했다.
반면 관세 협상의 키를 쥔 산업통상자원부 내에서는 "빨리 끝내야 한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자동차 등 주요 품목에서 경쟁국인 EU(유럽연합)이 미국과 공동합의문을 발표한 가운데 마무리가 늦어질 수록 한국 기업에 대한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편
EU는 지난달 21일 관세 합의를 문서화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지난달 27일 EU에 대해 상호관세를 15%로 인하하기로 한 지 25일 만이다.
미국과 EU는 "미국은 EU산 의약품, 반도체, 목재에 부과되는 최혜국대우(MFN) 관세와 무역확장법 232조 조치에 따른 관세를 합산한 (최종) 관세율이 15%를 초과하지 않도록 신속히 보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유럽산 자동차, 자동차 부품에 붙는 관세도 15%가 적용된다.
또 한·일 눈치게임? 전략적 모호성 되치기 당할라
전술적 시간 끌기에 대한 불안감도 없지 않다. EU는 이미 인하된 관세를 적용받은 데다 일본도 후속협상에 속도를 내면서 다시 일본과 눈치 게임을 해야 하는 데 대한 우려가 고개 들고 있다.
한국 정부는 지난 관세 협상 국면에서 EU와 일본 등이 협상을 마무리하지 않는 가운데 우리만 협상을 서둘러봤자 안 좋은 조건을 받아들 수 있다는 취지에서 지금과 비슷한 전략을 구사한 바 있다. 급할 수록 돌아가야 한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EU와 일본이 속속 협상을 체결하자 한국 정부는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을 만나기 위해 스코틀랜드까지 따라가는 등 막판 속도전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한국과 일본은 서로 경계하는데 한국 협상단이 미·일 무역 합의 내용을 보고 욕설을 했을 것"라는 원색적인 발언까지 쏟아내며 한국과 일본의 감정전을 부추기는 듯한 제스처도 취했다.
후속협의를 논의하는 현재 상황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합의문 논의를 위해 지난달 28~30일 미국 워싱턴DC를 방문할 예정이었던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재생상은 실무 조정을 이유로 방미를 돌연 취소된 가운데
한일 양국을 상대로 미국의 줄다리기가 시작됐다는 시각도 있다. 미·일 양국은 지난달 관세 협상 타결 당시 합의했던 일본의 5500억 달러(우리 돈 약 763조원) 대미 투자와 관련된 합의 문서를 쓰기로 하고 협의를 이어왔다. 투자 대상과 운용 방식 등 세부 내용에 대해 양국 간 견해 차를 해소하기 위해서 였다.
한국도 비슷한 상황이다.
한미 정상은 화기애애한 회담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정작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상호 관세율은 물론 자동차 관세 역시 15%로 낮추라는 행정 명령에 서명하지 않았다.주한미군의 역할 변경 등 외교·안보 부문의 논의는 별개로 하더라도, 당장 3500억달러 투자 펀드의 운용 방식을 놓고 한미 양국 간 이견 차가 큰 상황이다. 지난 7월 협상 타결 당시 한국은 대미 투자 펀드에 대해 1500억 달러는 조선업에 할당하고, 2000억 달러에 대해서는 대부분 직접 투자하기보다 대출·보증 형식으로 채워 부담을 최소화하겠다는 게 우리 측 구상이었다.
반면 러트닉 상무장관은 지난달 27일 CNBC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의 투자자금 그리고 다른 나라의 자금으로 국가 및 경제 안보 기금이 조성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며 "그들이 미국 사회기반시설 건설을 위해 우리에게 자금을 댈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이 5500억달러 금융 패키지로 우리보다 먼저 관세 인하를 얻어내자, 한 발 늦은 한국 정부도 비슷한 방식을 차용해 일단 협상을 타결했던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를 문서화하는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 모두 미국의 압박에 애를 먹고 있는 상황이 된 것.
산업부 관계자는 "금융 패키지가 전부는 아니지만 (후속협상이 늦어지는 원인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전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회담에서는 관세는 물론, 농·축산물 추가 개방, 주한미군과 국방비 관련 논의 등 첨예한 의제들은 전혀 언급되지 않으면서 찜찜함만 남은 상태다.
다만 산업부는 농·축산물 추가 개방에 대해서만큼은 더 이상 논의할 게 없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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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시간을 끄는 사이 미국발 관세 폭탄을 맞은 기업들의 부진은 심화하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는 매출액 기준 600대 기업을 대상으로 BSI를 조사한 결과 9월 BSI(93.2) 여전히 기준치를 밑돌았고, 특히 관세 영향이 큰 반도체는 지난달 대비 16.4p 하락했다. 통계청이 발표한 7월 산업활동동향을 보더라도 자동차 생산(7.3%) 지난해 7월 이후 가장 큰 폭의 감소를 보였다.
미국으로서는 당장 관세를 인하해주지 않아도 손해 볼 것이 없기 때문에 후속 협상에서 크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 자동차 관세를 볼모로 한국과 일본 사이 충분히 줄다리기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장상식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원장은 통화에서 "(협상이 타결된 순서로) 영국, 일본, 한국 순으로 (공동합의문을) 나지 않을까 싶다"며 "EU가 9월부터 인하된 관세를 적용받게 되면 한국은 10월 정도에나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추론이 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