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 스틸컷. NEW 제공때로 영화의 러닝타임은 영화관을 나선 후에도 이어집니다. 때로 영화는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비로소 시작합니다. '영화관'은 영화 속 여러 의미와 메시지를 톺아보고, 영화관을 나선 관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 스포일러 주의 40년 만에 돌아온 나쁜 계집애 나애리와 천방지축 계집애 하니가 진심과 꿈이란 '소실점'을 향해 함께 달려 나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벅차다. 국민 애니메이션 '달려라 하니'의 첫 극장판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는 나애리와 함께 이제 막 새로운 여정의 출발선에 서서 즐겁게 달릴 준비를 마쳤다.
달리기로 전국을 제패한 전국구 육상 스타 나애리(강시현)는 전학 간 빛나리 고등학교에서 딱 한 번 진 적이 있는 전 금메달리스트 하니(정혜원)와 다시 만나게 된다. 도심 골목에서 달리는 '스트릿 런'이라는 특별한 이벤트 경기에 참여하게 된 두 사람은 떠오르는 혜성 같은 신예 주나비(이새벽)와 맞붙게 된다.
40년 만에 첫 극장판으로 돌아온 '달려라 하니'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주인공 하니가 아니라 하니의 라이벌이자 하니가 늘 "건방진 계집애"라고 불렸던 나쁜 계집애 나애리가 주인공이다.
애니메이션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 스틸컷. NEW 제공지난 1985년 만화 잡지 '보물섬'에 처음 연재되며 등장한 '달려라 하니'는 이후 TV 애니메이션으로 확장, KBS2에서 방영되며 큰 사랑을 받았다.
19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하니는 그야말로 보기 드문 '센 여성'이었다. 더군다나 긴 머리 휘날리며 치마를 입고 등장하는 보통의 순정만화 속 여성 캐릭터와 달리 하니는 짧은 머리에 청바지를 입고, 천방지축인 점 등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줬다. 하니의 라이벌 나애리 역시 마찬가지다. 하니와 나애리는 성별만 바꾸면 소년만화 속 캐릭터라 할 법한 모습이었다.
2025년으로 옮겨온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는 그동안 '악역' '나쁜 계집애'라는 코스에 갇혔던 나애리를 보다 복합적인 캐릭터로 그려내고자 했다.
하니의 그늘에 가려졌던 나애리라는 인물에게도 '서사'가 있고 '꿈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그리고 악역이 아닌 선의의 라이벌이자 '달리기'라는 공통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두 청소년을 40년 만에 화해시키기 위해 영화는 주요 무대를 육상 트랙이 아닌 길거리로 옮겼다.
애니메이션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 스틸컷. NEW 제공영화는 서울 도심을 무대로 한 신개념 스포츠 'S런'(Street run)을 도입했다. 도시의 지형지물을 활용한 달리기인 S런은 마치 스트리트 레이싱 영화 '분노의 질주'를 연상케 한다. 자동차 대신 사람이 길을 질주하는 과정에서 몸싸움이 일어나기도 하고, 지형지물을 활용해 상대방을 앞지르기도 한다.
때로는 영화 '야마카시'나 '13 구역'을 떠올리게 하는 파쿠르(장애물이나 지형지물을 활용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빠르고 효율적으로 이동하는 신체 훈련법)까지 등장한다. 그야말로 '스트리트 러닝 액션'이다.
S런을 통해 현실성보다는 만화적인 설정으로 무게를 이동한 영화는 데포르메(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일부 변형, 왜곡, 단순화하여 표현하는 기법)된 SD 캐릭터를 활용한 코믹 연출도 자주 활용한다.
애니메이션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 스틸컷. NEW 제공이처럼 트랙이 아닌 '길'로 무대를 옮긴 데에는 드라마 위주의 기존 TV 시리즈보다 짧은 러닝 타임의 극장판 안에서 스펙터클한 재미를 주려는 의도도 있을 테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나애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영화 시작부터 나애리는 스스로에게 "난 무엇을 위해 이렇게 달리는 걸까"라며 질문을 던진다. 늘 하니의 등을 보며 달려야 했던 2인자로서 느끼는 열패감 외에도 나애리는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 스스로 정립하지 못한 상태다. 영화는 '왜' 달리는지 그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오로지 기록 경신과 이기기 위해서만 달리던 나애리를 결국 트랙이 아닌 길 위에 세운다.
기본기가 탄탄하고 기술적인 면에 충실한 나애리에게 육상 트랙은 안전한 울타리다. 육상 경기는 정해진 코스로만 달려야 하며, 코스를 벗어나는 순간 실격이다. 그 안에서는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오로지 기록과 승리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생은 정해진 코스로만 갈 수 없고, 코스에서 벗어날 때도 많다. 길에서 벗어나 보지 못한 사람에게 길 밖의 세상은 꿈꾸기 어려운 법이다. 그렇기에 규정에 맞춰 마련된 안전한 트랙이 아니라 변칙으로 가득한 정글 같은 도심으로 나애리를 데리고 나온 것이다. 정해진 길로만 달려왔던 나애리에게 정해진 길 밖의 세상을 보여주고, 그곳에서 보다 넓은 시야로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가길 원한 것이다.
애니메이션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 스틸컷. NEW 제공나애리가 길 위에서 발견한 건 '진심'과 '즐거움'이다. 그저 뒤만 쫓게 될 줄 알았던 하니를 통해 달려서 즐겁고, 즐겁기에 달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해진 길이 아닌 여러 갈래의 다른 길로도 갈 수 있음을 배운다. 그렇게 꿈을 발견한 나애리는 마침내 하니의 등 뒤가 아니라 하니와 나란히 달리게 된다. 트랙을 벗어나 길 위에서 달린 끝에 결국 '소실점'에 도달한 것이다.
나애리와 함께 관객들이 소실점에 도달하기까지 큰 역할을 한 것 중 하나는 '음악'이다. 록 밴드 노브레인의 황현성 음악감독이 총괄 프로듀싱을 담당한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의 '소실점' '횡단보도' 등 OST는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두근거림과 설렘, 벅찬 감정을 안긴다. 캐릭터, 장면과 하나 되는 OST의 리듬과 가사는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아쉬운 지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녹록지 않은 국내 극장판 애니메이션 제작 환경 속에서 '달려라 하니'의 40주년을 기념하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탄생했다는 데 조금 더 의의를 두고 싶다. 그렇기에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가 보다 많은 관객에게 가닿고, '애리와 하니는 돌아온다'는 마블식 엔딩처럼 후속편이 나오길 바랄 뿐이다. 과연 다시 돌아온 나쁜 계집애와 천방지축 계집애가 다음에는 또 어떤 소실점을 향해 함께 달려갈지 보고 싶기 때문이다.
91분 상영, 10월 7일 개봉, 전체 관람가.
애니메이션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 포스터. NEW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