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1일 인천 주안역 앞에서 열린 민생회복 법치수호 인천 국민대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인천=박종민 기자'불법 비상계엄 1년'이 된 3일, 국민의힘 지도부는 평소보다 조용한 하루를 보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일정은 '통상업무', 한 줄이 유일했다. 평일이고, 장동혁 대표가 당권을 잡은 지 정확히 '100일'이 된 날이란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당에서는 장 대표가 평소에도 주요이슈에 대한 입장을 내왔다며 '100일이라고 특별할 게 있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결국 계엄 관련 십자포화를 맞을 수밖에 없는 '껄끄러운 자리'를 피하고자 했을 거란 해석이 나온다.
회견 대체한 입장문, 사실상 '사과 거부 선언'
장 대표는 공개행보 없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계엄 1년 소회를 밝혔다.
취재진의 불편한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되는 일방적 소통방식을 택한 것이다. 지도부 중 사과의 총대를 멘 것은 송언석 원내대표가 유일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회견을 대체한 장 대표의 입장문은 더 큰 파장을 낳았다.
1천여 자 남짓이 대부분 추경호 의원 영장 기각을 근거 삼은 당정의 '내란몰이' 비난에 할애됐기 때문이다.
이날 오전 게시된 장 대표 글은
"12·3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습니다"로 시작된다. 이유 여하를 떠나 계엄의 불법성과 위헌성을 시인하는 표현이라기보다는, 맥락상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웅변하는 것으로 읽히는 문장이다. 당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면서도 책임 소재는 남 탓으로 돌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던 것"을 패착 요인으로 진단한 대목에선 '찬탄(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찬성)파'를 향한 가시가 느껴진다. 더 나아가
"보수정치가 외면받는 이유는 핵심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계엄 반성과 혁신의 약속으로 받아들인 국민은 상당히 드물 것으로 보인다.
계엄의 역사, 또 그 주동자였던 윤 전 대통령을 여전히 신봉하는 세력과 단절할 생각이 없다는 '사과 거부 선언'을 한 셈이다. 장 대표가 계엄령을 '계몽령'이라고 호도한 극우세력의 비호를 받아온 점에 비춰 자연스러운 결론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장 대표의 100일을 몇 가지 '말(言)'들로 짚어봤다. 윤석열 접견
"전당대회 기간에 당원과 국민께 약속드린 것은 특별한 사정의 변화가 생겨서 지킬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것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8월 26일). 장 대표가 당선 직후 선거과정에서 공약한 '윤 전 대통령 접견'에 대해 한 말이다. 그는
선출 두 달 만인 10월 17일 구치소 일반면회로 윤 전 대통령을 만났다. 이 자리에는 강성 반탄파인 김민수 최고위원이 동행했다.
당시 장 대표는 당이 배출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인간적 예의의 차원'이란 취지로 확대 해석을 피했다. 그러나
내란수괴 혐의로 구속 기소된 윤 전 대통령의 상징성을 고려하면 의례적 수준의 방문으로 간주하긴 어려운 장면이란 게 중론이다. 단순히 자신을 지지해준 강성 당원들에 대한 의리로만 보기도 힘들다는 취지다.
이는 한 달 전 장 대표가 '월간 호남' 구상을 밝히며 험지인 광주행(行)에 나섰을 때 환대를 받지 못한 가장 큰 이유기도 하다.
"이재명 탄핵"
"지금 엉망으로 망가지는 대한민국을 구하는 방법은 딱 하나, 이재명을 대통령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는 것뿐입니다. 국정조사와 특검을 통해 이재명을 탄핵해야 합니다"(11월 11일). 장 대표의 발언 수위는 지난달 7일 이재명 대통령이 얽힌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가 불거지면서, 한층 더 과격해졌다. 이 대통령의 직함마저 생략한 채 취임 반년도 안 된 대통령 탄핵을 앞장서 띄운 것도 그였다. '탄핵'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이튿날에는 이 대통령을 가리켜 "대한민국의 재앙"이라고도 했다.
국민의힘이 매일같이 정부·여당에 '야당을 대화상대로 존중하라'고 촉구하는 취지와 배치되는 언사다. 대통령 탄핵안 발의 및 통과는 의석수 상 실현가능성도 없다. 오직 강성 당원들에게 소구하는 것 외엔 달리 순기능도, 실효성도 찾기 힘든 '센 말'들의 향연이 잇따른 것도 이때부터다.
"우리가 황교안"
1일 인천 주안역 앞에서 열린 국민의힘 민생회복 법치수호 인천 국민대회에서 지지자들이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인천=박종민 기자"무도한 정권이 '대장동 항소 포기'를 덮기 위해 황교안 (전) 총리를 긴급체포하고 지금 압수수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전쟁입니다. 우리가 황교안입니다"(11월 12일). 화룡점정으로 꼽히는 발언은 단연 '우리가 황교안'이다.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시절, 당을 이끌었던 황 전 총리는 윤 전 대통령과 같은 대표적 '부정선거 음모론자'다.
부정선거론에 사로잡힌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뒤, 계엄군을 0순위로 투입한 곳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였던 사실을 모르는 국민은 거의 없다. 절차상 특검 수사가 무리한 측면이 있었음을 지적하려는 취지였다 해도,
상식적이지 않은 동일시였다는 얘기다. 특수한 상황에 국한된 연대 표명이 아니었다는 점도 증명됐다. 장 대표는 '황교안 발언' 나흘 만에 우파 유튜브 '이영풍TV'에 출연해 황 전 총리가 창당한 자유와혁신, 사랑제일교회 전광훈씨, 우리공화당 등과 내년 지방선거에서 힘을 합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과거에서 벗어나자 외치는 게 과거에 머무는 것"
"과거에서 벗어나자고 외치는 것 자체가, 과거에 머무는 것입니다"(12월 1일). 최근 호남을 빼고 전국을 순회한 '민생회복 법치수호 국민대회'에선, 계엄에 대해 더 이상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장 대표의 의중이 더 분명히 드러났다. 그는 이달 1일 인천에서 열린 당 주최 집회에서 "과거 위에 현재가 있고, 현재 위에 미래가 있다. 우리가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윤 어게인(YOON Again)' 등 이른바 집토끼들은 열광하고 있지만, 장 대표가 부르짖듯 '단일대오'를 통한 내년 선거 압승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12·3 비상계엄 사태 1주년인 3일 오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부산 사하구을)이 무릎을 꿇은 채 문재학 열사의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실제
당내에선 계엄 1년의 의미를 퇴색시킨 장 대표에 대한 날선 비판들이 나왔다.
초선 김재섭 의원은 "장 대표는 반성과 성찰은커녕 계엄이 불가피했다는 식의 또다른 '계몽령'을 선언했다"며
"(장 대표 말처럼) 비상계엄이 '의회 폭거에 맞서는 계엄'이라면 왜 해제 표결에 참여했나"라고 꼬집었다. 박정훈 의원도 "'다시 돌아가도 계엄 해제 표결에 불참할 것'이라고 했던 권영세 의원마저 사과했다. 초·재선 25명에 더해 개별적으로 사과 글을 올린 의원들까지 (있다)"며
"장동혁 지도부가 지금 당원 다수의 마음을 대표하고 있는 게 맞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당내 최다선인 조경태 의원은 광주를 찾아
"1980년 5월 광주를 기억한다면 두 번 다시는 불법 계엄 같은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며 "윤 전 대통령이 저지른 죄에 걸맞게 최고형으로 다스려 더 이상 선진 대한민국에 헌정 유린 세력의 싹이 자랄 수 없게 완벽히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