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검색
  • 댓글 0

실시간 랭킹 뉴스

미완의 평전, 안성기라는 완전한 배우 [책볼래]

노컷뉴스 이 시각 추천뉴스

이 시각 추천뉴스를 확인하세요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 그리고 끝내 쓰이지 못한 후반부

배우 안성기배우 안성기
안성기가 떠났다. 향년 74세.

1957년 다섯 살의 아이로 영화 속에 들어온 그는, 2023년 '노량: 죽음의 바다'까지 스크린을 떠나지 않았다. 70년. 한국영화사에서 이 숫자를 가진 배우는 없다. 그리고 아마, 다시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국민배우'라는 수식어가 진부하게 들릴 정도로, 우리는 오랫동안 그를 그렇게 불러왔다. 그러나 정작 그 말 속에 담긴 무게를, 그 긴 시간의 밀도를, 우리는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을까.

무라야마 도시오가 쓴 안성기 평전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사월의책)는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한다. 일본인 작가가 바라본 안성기. 이 책은 영웅담도, 찬가도 아니다. 오히려 낯설 만큼 차분하고, 집요하게 '한 배우의 삶'과 '한 사회의 시간'을 겹쳐 놓는다.

저자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문장은 단순하다. "안성기를 보면 한국 사회가 보인다."

이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안성기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연기한 인물들은 언제나 시대의 가장 낮은 곳에 서 있었다. '바람불어 좋은 날'의 배달원, '고래사냥'의 떠돌이, '칠수와 만수'의 노동자, '태백산맥'의 빨치산, '투캅스'의 비리 경찰, '라디오 스타'의 퇴물 매니저. 그는 단 한 번도 권력의 얼굴이 아니었다. 늘 밀려난 사람의 얼굴이었고, 상처 입은 시대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안성기의 얼굴은 편안하지만 가볍지 않다. 온화하지만 흐리지 않다. 그 얼굴에는 늘 체념과 저항, 순응과 분노가 동시에 얹혀 있었다. 그것이 그를 '좋은 배우'가 아니라, '시대를 연기한 배우'로 만들었다.

안성기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상류계급 사람들과 달리 사회적으로 밑바닥에 놓인 사람들은 표현할 만한 것이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이 문장은 그의 연기 철학이자, 삶의 태도다. 그는 스타가 되는 길보다, 의미가 남는 길을 택했다. 주연에서 조연으로 내려오는 순간에도, 그는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부터 그의 얼굴은 더 깊어졌다. 더 적어졌고, 더 무거워졌다.

사월의책 제공 사월의책 제공 
임권택 감독이 그를 두고 "도사나 신선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절제된 삶, 스캔들 없는 태도,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 자세. 안성기는 스스로를 "무던하게 살아온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 무던함은 사실 철저한 자기 통제와 책임감의 결과였다. "젊은이다운 기개가 부족했다"는 그의 고백은 겸손이었지만, 그 겸손 자체가 이미 드문 미덕이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2017년 그의 데뷔 60주년을 맞아 특별전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를 열었을 때, 그를 정의한 단어는 '스타'가 아니라 '페르소나'였다. 얼굴 그 자체가 한국영화의 정서가 되고, 시대의 감정이 되는 존재. 그것은 연기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한국 사회가 가장 흔들릴 때, 가장 조용히 거기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죽음은 한 배우의 퇴장이 아니라, 한 시대의 표정이 사라진 사건에 가깝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곧 한국영화의 역사였다.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까지 빠짐없이 주연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유행을 탄 배우가 아니라, 시대를 건너온 배우였다는 증거다.

그러나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는 2011년에서 멈춘다. 저자 스스로도 이 책을 "아직 완결되지 않은 중간보고"라고 했다. 그 말은 이제 더 아프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그 이후의 안성기, 주연에서 내려온 뒤의 시간, 병과 싸우면서도 영화계를 독려하던 모습, 그리고 2023년 '노량'까지 이어진 그의 마지막 필모그래피는 정식 평전으로 기록되지 못한 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학인의 삶은 기록한다. 독립운동가의 생애는 복원한다. 정치인의 궤적은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배우와 영화인의 삶은 쉽게 흘려보낸다. 인터뷰 몇 편, 추모 기사 몇 줄, 다큐멘터리 한 편으로 대신한다. 해외에서는 배우의 생애를 다룬 평전이나 자서전이 하나의 장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전히 드물다.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가 사실상 유일한 안성기 평전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더 쓸쓸하다.

안성기의 삶은 단순한 개인사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영화 산업의 변화, 검열의 시대, 상업화의 물결, 신자유주의적 제작 환경, 그리고 K-콘텐츠로 이어지는 오늘까지를 관통하는 살아 있는 역사다. 그런 인물의 후반부가 기록되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영화사가 스스로의 얼굴을 지우는 일과 다르지 않다.

배우 안성기 필모그래피배우 안성기 필모그래피
책이 기록을 멈춘 사이, 그는 끝까지 현장에 남아 있었다. "연기란 제 삶 자체죠. 다른 건 해본 일이 없어서 상상조차 되지 않아요." 이 말은 미사여구가 아니라, 실제 삶이었다. 그는 배우로 태어나, 배우로 살다, 배우로 떠났다. 그리고 그 얼굴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다. 가장 힘들 때, 가장 초라할 때, 가장 흔들릴 때. 안성기의 얼굴은 늘 스크린 어딘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울고, 참고, 버티고 있었다.

현장에서 그와 함께 했던 영화인들 못지 않게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의 부고는 유난히 개인적이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이웃을 떠나보낸 것처럼, 마음 한켠이 비어버린다. '국민배우'라는 말이 이토록 실감 나는 순간도 드물지 않을까.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라는 제목은 이제 더 깊은 의미를 갖는다. 그는 청춘이 지나서 더 빛났고,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얼굴을 품었다. 안성기는 떠났지만, 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영화인생 70년과 평전의 미완 10년, 병과 싸우며 지켜낸 품위, 주연과 조연을 넘나들며 보여준 존엄, 그리고 한국영화의 어른으로 남았던 시간들. 그 모든 것은 반드시 기록되어야 한다. 그것이 국민배우에 대한 예의이자, 한 시대에 대한 책임이 아닐까.

저자 무라야마 도시오는 출간 당시 영화매체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완결판'에 대한 질문에 "그것은 저보다 배우에게 보다 가까이 있는 한국 분들이 하실 거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한국영화는 안성기를 가져 빛났다. 그리고 이제, 안성기를 다시 써야 할 차례다. 한국영화에 숙제를 남겼다.

5일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고(故) 안성기 배우의 빈소가 마련돼 있다. 사진공동취재단5일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고(故) 안성기 배우의 빈소가 마련돼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 / 무라야마 도시오 지음 | 권남희 옮김 | 사월의책 | 288쪽



0

0

실시간 랭킹 뉴스

오늘의 기자

※CBS노컷뉴스는 여러분의 제보로 함께 세상을 바꿉니다. 각종 비리와 부당대우, 사건사고와 미담 등 모든 얘깃거리를 알려주세요.

상단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