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중국의 외교 사령탑인 왕이 외교부장의 8일 전국인민대표회의 외교분야 기자회견은 국제 현안에 대한 중국의 인식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우선 중국이 핵심이익으로 간주하는 대만문제에 대해선 강경한 입장을, 최대 이슈인 이란 전쟁에 대해선 비판적 자세를 보였다. 기존 태도에 비춰 볼 때 얼마든지 예견할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올들어 최대 국제정치 이벤트가 될 4월 미중 정상회담에 관한 몇가지 힌트가 숨어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반도 문제에 대해 왕 부장이 2년 연속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점은 미중회담의 중요 의제에서 밀려나 있다는 점을 방증하기도 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한을 '적대국'으로 규정한 상황과 맞물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방해 없어야" 트럼프 방중에 공들이기
이달 말 트럼프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이란 사태가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은 사실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이란 전쟁 초기에는 '미국의 이란 공격이 국제법 위반'이라고 직설적으로 비판했던 왕 부장의 톤은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한결 누그러졌다.
"세계가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며 즉각적인 전쟁 중단과 대화.협상을 통한 사태 해결을 촉구했지만, 미국을 직접 거론하지 않았다. 각국의 주권과 안보는 존중돼야 한다며 우방인 이란에 힘을 실어줬다. 그렇지만 미국과의 대결보다는 대화와 교류에 방점을 찍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중국 방문과 세계 1.2위 정상간의 회담을 통해 얻을 게 더 많다고 중국이 판단한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보니 왕 부장은 "올해는 확실히 중미 관계의 중요한 해"라며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한발 더 나아가 "고위급 교류 일정이 이미 테이블에 올라와 있다"며 정상회담을 위한 적극적인 분위기 조정에도 나섰다.
양국이 잘 준비하고 적절한 환경을 조성해 불필요한 방해를 배제하자고 했다. 정상회담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길 바란다는 속마음을 감추지 않은 것이다. 중국이 먼저 이란 전쟁을 이유로 트럼프 대통령의 방문을 조정하거나 회피할 가능성은 매우 낮아졌다.
"대만은 국가 아냐" 핵심이익에 쐐기
왕이 부장은 '유사시 대만 개입' 발언을 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를 강도 높게 비판하며 대만 문제에 대해 확실한 대외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대만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중국 영토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일본이 무슨 자격으로 개입할 수 있느냐"고 따져물었다. 일본의 개입은 내정간섭이라는 것이다.
특히 왕 부장은 올해가 도쿄재판 80주년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며 "역사는 일본에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고 했다. 일본의 침략을 국제사회가 전범으로 인정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다시 과거의 길을 되풀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겉으로는 일본에 대한 강경 대응이지만 방중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압박을 주겠다는 의도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지난달 4일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통화에서 대만에 무기를 팔지 말라고 직접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대만 문제는 중국의 핵심 이익 중 핵심으로 이 레드라인을 넘거나 밟아서는 안된다"는 왕 부장의 발언은 비단 미국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언급없는 '한반도'…미중회담서 빠지나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이 좌충우돌식으로 전개하는 보호주의 정책 탓에 국제 정세가 어느때보다 혼란스러운 시기다. 이는 미중회담에서 양측이 다룰 중요한 의제가 그만큼 많아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중국이 수위 조절은 하고 있지만 이란 사태는 빠질 수 없는 의제다. 여기에 더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국의 군사개입, 석유·에너지 공급 문제, 반도체 공급망, 미 대법원이 위법 판결을 내린 관세, 무역 불균형 등 여러 의제가 산적해 있다.
이렇다보니 한반도 문제는 미중 정상회담 의제에서 우선순위가 밀리게 됐다. 왕 부장은 기자회견에서 2년 연속 한반도 관련 발언을 하지 않았다.
이재명 정부의 유화 메시지에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달 25일 남한을 '영원한 적' '적대국'으로 규정하며 남북대화와 교류에 담을 쌓는 모습이다. 이는 남북 관계에서 민족적 동질성을 떼내 국제적 적대관계로 전환시킨 것이어서 남북교류 자체가 차단될 가능성이 커졌다.
한반도가 본격적인 냉각기로 접어들기 직전에 열리는 미중 정상회담은 위기이자 기회가 될 수 있다. 정부도 통일·외교 라인을 동원해 한반도 평화를 의제로 올리기 위한 물밑 접촉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중 정상의 귀가 솔깃해질 만한 정책과 아젠다를 어떻게 마련하고 설득하느냐가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