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왕구이추싸가 가족과 함께 찍어 뤄신윤씨에게 보낸 가족사진. 중국 쯔뉴신문(紫牛新闻) 제공1948년 국공내전으로 혼란스럽던 시절 36세 뤄신윤(骆新鋆)은 당시 진링(金陵) 병기공장에서 일했다. 당시 국민당 정부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주요 공장과 자산을 대만으로 옮기기로 했다. 뤄씨도 정부의 명령으로 대만으로 가야 했다.
뤄씨는 애초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천식에 걸린 아버지, 임신한 왕구이추(王桂秋), 6살 난 딸 완전(骆万珍), 3살짜리 완룽(万蓉)까지.
하지만 배에 있던 사람의 한마디가 마음을 바꾸게 했다. "가는 길에 누가 배 안에서 죽으면 바로 바다에 던져진다." 뤄씨는 15살 된 큰아들만 데리고 가면서 나머지 자녀들에게 "내가 일을 안착시키자마자 곧바로 데리러 갈게"라는 말을 남기고 배에 올랐다.
이렇게 이별한 지 30년간 뤄씨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시대의 장벽에 막힌 탓이었다. 뤄씨가 대만으로 간 다음 해인 1949년 이후 중국 본토와 대만 간 왕래는 물론 우편 교류도 완전히 단절됐다.
남편이 떠난 후 아내 왕씨는 연로한 시부모를 모시며 혼자서 세 아이를 키웠다. 막내는 아버지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청년이 됐다. 딸 완전은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생활은 비록 어려웠지만, 어머니가 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는 항상 아버지 얘기를 자주 하셨다. 아버지는 정말 좋은 분이고 효도도 잘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뤄신윤씨가 30여년만에 중국 가족에게 보낸 편지 봉투. 양안 교류 단절로 류씨는 미국을 경유해 중국으로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중국 쯔뉴신문(紫牛新闻) 제공
뤄씨의 편지가 그의 집인 '난징 바오따산 60호(南京宝塔山60号)'에 닿은 것은 1979년 11월 10일이다. 뤄씨는 함께 대만에 갔던 친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그를 통해 편지를 부칠 수 있었다. 편지는 '대만→미국→중국 본토'로 태평양을 두 번이나 건너 고향집에 도착했다.
31년 만에 도착한 편지에는 정갈한 글씨체 속에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짙게 배어 있다.
뤄신윤씨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 중국 쯔뉴신문(紫牛新闻) 제공"백부님, 백모님, 두 분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아내 계추에게: 여러분과 헤어진 지 오래되어, 그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습니다. 집안 식구들의 근황을 모르니, 회신을 주셔서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그리움에 못 견디겠습니다."
왕씨는 글씨를 몰라 가족들이 편지를 읽어줬다. 떨어진 가족은 편지를 통해서만 경조사를 알 수 있었다. 뤄씨는 아내에게 "큰 아들은 결혼했고, 지금 아들 하나에 딸 셋이 있다"는 소식을 전하며 "우리 모두 잘 지내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안심시켰다.
그러면서 두 딸의 이름을 부르며 결혼 여부를 물었다. 막내의 이름은 무엇인지, 결혼을 했는지도 애타게 궁금해 했다.
1980년 1월 20일 편지에도 가족에 대한 애환이 묻어 있다. "백부님, 백모님, 그리고 삼제(三弟·셋째 동생)가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햇수는 알지만 몇 년 몇 월인지는 모르겠어. 기억나면 알려 주게나. 내가 추도할 수 있게."
가족들이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조차 몰랐고, 편지를 보내 구체적인 날짜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완전씨는 "아버지는 대만에서 얼마나 마음이 탔을까"라며 눈시울을 젖혔다.
완전씨가 마흔이 되는 생일에 보낸 편지는 부정(父情)과 부채 의식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완전이 올해 음력 6월 초닷새가 마흔 번째 생일이구나. 아버지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해 너무나 부끄럽구나. 용서해주길 바란다."
그는 아내에게 동봉한 미화 100달러를 완전씨에게 줘서 원하는 물건을 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나의 사과하는 마음을 표시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완전씨는 이 편지를 가장 잊을 수 없는 편지라고 소개했다. 그는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아버지가 계속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 생일, 동생 생일, 모두 돈을 보내주셨다"고 했다.
첫 편지를 받은 지 10년 정도가 지난 1988년 드디어 뤄씨가 집으로 돌아왔다. 대만 정부가 1987년 10월 '대륙 친척 방문'을 공식적으로 허용한 데 따른 것이다. 운 좋게도 첫 공식 방문단에 포함됐다.
1988년 40년 만에 귀국해 가족사진을 찍은 뤄신윤씨(두번째 줄 가운데). 중국 쯔뉴신문(紫牛新闻) 제공뤄씨는 36세 청년의 모습으로 떠났다가 76세 노인의 모습으로 고국 땅을 밟았다. 아내 왕씨는 사람들 사이에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뤄씨는 곧바로 난징에 정착할 수 없었다. 체류 기간은 두 달이었고 다시 대만으로 돌아가서 수속을 밟아야 했다. 2년이 지난 1990년 중국이 '대만동포 본토 귀환 정착 문제에 관한 통지'를 발표하면서 법적 문제가 해소됐다. 그는 이렇게 '바오따산 60호'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큰아들과 며느리가 애를 많이 썼다.
워낙 늦은 나이에 고향에 온 탓일까, 뤄씨는 3년 만인 1993년 세상을 떴다. 그래도 가족 간 만남은 계속됐다. 큰아들 부부는 이민 간 미국에서 매년 국경절마다 들어와 두 달 정도를 함께 보냈다. 그들은 '바오따산 60호' 옛집에 머물렀다. 이럴 때마다 온 가족들이 이곳에 모여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냈다.
7년 전 뤄씨를 보낸 왕씨는 2010년 96세 나이로 남편을 따랐다. 세월이 흐르면서 큰아들은 장거리 비행이 힘에 부쳐 유선 전화로 동생들에게 새해 인사를 대신한다.
옛 황실의 은혜에 보답하는 장소였던 다바오은사(大报恩寺)는 2015년 다바오은사 유적지 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꿔 복원됐다. 최근 박물관 특별전시관에는 뤄씨의 가족사가 조용히 전시됐다. 하지만 중국 근대사를 관통한 이 사연은 온라인에서 빠르게 퍼져 나가며 중국인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온라인에서는 "이렇게 가슴 뭉클한 대본이 또 있을까. 진짜 영화로 만들어야 한다", "국공내전이라는 시대의 비극이 만들어낸 개인의 아픔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등의 댓글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