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5년 11월 1일 경주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 모습.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이름이 현지어 발음에 따라 한글로 '시진핑'이라고 쓰여져있다. 북한이 '습근평'이라는 한글 발음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과 비교가 된다. 청와대 홈페이지 캡처북한은 중국 사람의 한자 이름을 한글로 발음한다. 예를 들어, 시진핑(習近平) 국가 주석은 '습근평'으로 읽고 쓴다.
한국에서는 보통 '시진핑'(Xi Jinping)으로 부른다. '시진핑'은 중국인들이 쓰는 현지어 발음이다. 습근평은 한자의 우리말 발음이다.
북한은 한자 표기나 중국어 발음을 배격하는 경향이 있다. 자주성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시진핑 주석을 '시진핑'(Xí Jìnpíng)으로 부르지 않는 나라가 북한 말고 또 있다. 바로 이웃나라 일본이다.
일본 정부와 언론은 '시진핑'(習近平)을 흔히 '슈킨페이'(しゅう・きんぺい)라고 읽는다. 한자의 일본식 발음을 고수한 것이다.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인 베트남도 마찬가지다. 중국식 발음인 '시진핑'이 아니라 '떱 껀 빙'(Tập Cận Bình)으로 부른다고 한다.
역시 베트남 고유의 한자 발음을 더 중시하고 있다.
과거 한자를 사용했던 주요 국가들 가운데, 중국인들의 발음에 따라 '시진핑'으로 읽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한 셈이다.
2026년 6월 8일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 주석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 주민들이 환영하는 모습. 시진핑의 이름을 한글로 '습근평'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한국의 이런 발음과 표기의 방식이 중국에 대한 저자세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 듯하다.
우리나라가 현대 중국의 인명과 지명을 현지 발음에 따르도록 한 시점은 적어도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문교부 고시 제85-11 '외래어 표기법'에 "현대인은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되 필요한 경우 한자를 병기한다"고 규정돼 있다.
이 고시에는 중국의 지명 역시 중국어 표기법에 따른다고 돼있다. 이런 외래어 표기의 '원지음주의'가 1948년에 제기됐다는 자료도 있다. (김민수, 한자 표기 原地音主義의 문제, 새국어생활 14-2, 2004년)
어쨌든 1986년 '문교부 고시'의 시행 시점에, 한국은 중국과 외교 관계가 없었다. 이 때 중국은 '중공(中共)'이라고 불리는 한국의 적대국가였다.
국내 언론들은 1990년대 후반부터 이런 흐름에 동참한 것으로 보인다. 강택민(江澤民)·이붕(李鵬) 대신, 점차 장쩌민(Jiāng Zémín)·리펑(Lǐ Péng)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사망한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도 처음에는 한글식 발음인 '주용기'로 불렸다. 그러다 나중에 '주룽지'(Zhū Róngjī) 로 정착됐다.
서양은 원래부터 한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국가별로 한자어에 대한 독자적 발음도 없다.
따라서 영어권 국가들은 중국인의 이름을 부를 때, 중국어 병음(拼音) 표기를 근거로 읽으면 된다. 병음은 중국이 스스로 로마자로 만든 발음기호다.
하지만 한자문화권 국가들은 중국어 발음 이외에, 한자를 읽는 자국 고유의 발음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고민이 생긴다.
한국은 중국의 현지 발음을 중시하는 쪽을 선택했고, 북한과 일본, 베트남은 자국 발음을 우선시하고 있다.
지난 2025년 11월 1일 경주에서 열린 시진핑 주석을 위한 국빈만찬장에 입장하는 한중 정상. 청와대 제공 중국은 어떤가? 중국은 이웃 한자문화권 국가들의 고유 명사를 모두 중국식 발음으로만 읽는다.
예를 들어, 중국의 정부기관이나 관영방송들은 이재명(Lee Jae Myung) 대통령을 '리짜이밍'(Lǐ Zàimíng)으로 부른다.
지난 해 11월 경주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의 모두 발언에서도 그랬다.
이 대통령은 '시진핑'이라고 읽었고, 시 주석은 '리짜이밍'으로 발음했다.
중국은 이재명(李在明)이라는 이름에 한자가 있으니, 그냥 중국식으로 발음하는 것이다. 박근혜(朴槿惠) 전 대통령은 '피아오진후이'(Piáo Jǐnhuì)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인천(仁川)은 '런촨'(Rénchuān)이고, 대구(大邱)는 '다추' (Dàqiū), 경주(慶州)는 '칭저우'(Qìngzhōu)로 읽는다.
지난해 11월 1일 경주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 국빈만찬에서 시진핑 주석도 경주(慶州)를 '칭저우'라고 불렀다.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인 관광객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경복궁(景福宮)은 징푸궁(Jǐngfúgōng)이고, 강남(江南)은 '장난'(Jiāngnán) 이다.
그리고 이런 지명에 익숙해진 채로 귀국한다. 한국의 도시나 사람의 이름을 중국의 언어로 기억하는 것이다.
중국은 북한을 '조선'(朝鮮)으로 쓰고 '챠오센'(Cháoxiǎn)이라 부른다. 평양(平壤)은 '핑랑'(Píngrǎng), 개성(開城)은 '카이청'(Kāichéng) 이다.
김정은(金正恩)은 '진정언'(Jīn Zhèng'ēn)으로 읽는다.
중국 외교부는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총리를 '가오스 짜오먀오'라는 중국식 발음으로 부른다. 사진은 린젠(林剑)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다카이치 총리를 비판했던 지난 3월 19일 브리핑 모습.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 캡처중국 정부와 관영 방송은 일본의 인명 및 지명도 모두 중국어로만 읽는다. 예를 들어,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리를 '가오스 짜오먀오'(Gāoshì Zǎomiáo)라고 부른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총리는 '안톈 원슝'(Àntián Wénxióng)이다. 발음만 들으면 완전히 딴 사람처럼 들린다.도쿄(東京)는 '둥징'(Dōngjīng), 나가사키(長崎)는 '창치(Chángqí)다. 일본이 아닌 중국의 도시로 착각이 될 정도다.
자칫 중국이 아시아의 한자문화권 국가들을 여전히 자국의 영역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의심을 살 수도 있다.
일본 외교부의 2024년 외교청서의 일부. 본문에서 파란색으로 강조된 부분을 보면, 시진핑 (習近平) 주석의 이름에 しゅう・きんぺい(슈킨페이)라는 일본식 발음을 달아 놓았다. 일본 외교부 홈페이지 캡처일본 정부와 언론도 중국의 인명과 지명을 일본식 한자 발음으로 읽는 경우가 많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을 '슈킨페이'(しゅう·きんぺい)로 읽는 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왕이(王毅) 외교부장의 이름은 '오우키'(おう·き)로 불린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北京)은 '페킨'(ペキン) , 충칭(重慶)은 '주우케이'(じゅうけい)라고 발음한다. 일본은 백 년이 넘은 이런 서양식 또는 일본식 이름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이런 지명은 일본이 한반도와 중국을 침략했던 제국주의 시절에도 불렸던 이름들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 있다.
일본 외교부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을 일본식 발음에 따라 '슈킨페이'라고 부른다.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외교장관도 지난 6월 9일 시 주석의 북한 방문과 관련된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슈킨페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사진은 이날 열린 모테기 장관의 기자회견 모습. 일본 외교부 공식 유튜브 계정 화면 캡처
주목할 점은, 일본이 한국은 중국과 다르게 대한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와 언론은 한국의 인명과 지명을 모두 한글 발음으로 표기하고 읽는다.
한국에서 근무하는 일본 특파원들도 보통 한국 대통령을 '이재명'(イ·ジェミョン)이라고 부른다. 이재명(李在明)의 일본식 발음인 '리자이메이'라고 하지 않는다.
'경주'(慶州)도 '케이슈'가 아닌 '경주'(キョンジュ)라고 말한다. 물론 일본 사람들의 한글 발음은 100% 정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 이재명은 '이재묜', 경주는 '굔주'로 들린다. 하지만 적어도 일본식 한자 발음으로 읽지는 않는다.
우리 정부와 언론도 일본의 인명·지명을 현지 발음대로 부르는 것이 관행이 됐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를 '안배 진삼'으로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교토(京都)를 '경도'라고 쓰는 언론도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일종의 상호주의가 적용된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시진핑 주석의 이름도 얼마든지 중국 현지음으로 읽을 수 있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일종의 '역(逆)상호주의'다.
상대국의 인명과 지명에 대한 발음과 표기 정책에, 아직 불신의 과거사가 투영돼 있는 것이다.
2025년 10월 31일 APEC 정상회의 환영 만찬 모습. 청와대 제공국제 관계에서 상대국의 언어를 존중하는 것은 기본 예의이면서 친근감의 표시다.
세계 각국 지도자들이 외국을 방문할 때, 간단한 현지어 인사말로 대화를 시작하는 일도 적지 않다.
그런데 한국을 예외로 할 경우,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 국가들은 대부분 자국 발음만 고집하고 있다. 정상들의 친교를 위한 행사에서조차 그렇다.
아마도 서로 자국의 문화적 존재감 또는 우월감을 보여주려는 계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국의 오래된 고유명사들이 낯선 상대국의 언어로 읽힐 때 국민들은 서로 거리감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같은 문자를 사용했다는 문화적 공통점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 꼴이다.
강성웅 국제정치 칼럼니스트, 전 YTN 베이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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