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파리올림픽을 앞둔 지난 6월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에서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 황진환 기자 안세영(삼성생명)이 역대 여자 단식 최다 우승의 역사를 쓰고 남녀 복식도 선전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한국 배드민턴. 이런 가운데 A 전 국가대표 감독이 B 전 코치에 지시해 수천만 원 상당의 용품을 무단으로 반출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대한배드민턴협회, 대한체육회 조사 등에 따르면 전 국가대표 B 코치는 A 전 감독의 지시에 따라 지난해 1월 충북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에서 셔틀콕 17박스를 실어냈다. 2024년까지인 코칭스태프 계약 기간이 끝난 가운데 B 코치는 임시 출입증으로 선수촌에 들어가 차량으로 물품을 운반했다. B 코치는 선수촌 직원에게 "개인 짐을 꺼내간다"고 말해 출입이 허가된 것으로 알려졌다.
협회 공식 후원사인 요넥스에서 받은 셔틀콕으로 대표팀이 쓰는 제품은 1박스 소비자 가격이 350만 원 가량이다. 17박스면 6000만 원에 이른다. 물론 공급가로 한다면 박스당 200만 원이 넘는 액수(추정)지만 그래도 약 3500만 원이나 된다.
여기에 다른 용품 등이 실린 2박스까지 총 19박스가 밀반출됐다. 협회에서는 셔틀콕이 용품 관련 업체에 전달돼 용품이 현금화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새로운 대표팀 코칭스태프가 선수촌에 들어가 물품 수량을 확인하면서 밝혀졌다. 협회 관계자는 "지난 2024년 연간 훈련이 종료된 가운데 선수촌 창고에 셔틀콕 17박스 등 남아 있는 용품을 당시 다른 코치진이 사진으로 찍어 보내줬다"면서 "그런데 지난해 초 해당 용품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충북 국가대표 선수촌 전경. 연합뉴스
이에 협회는 A 감독에게 해당 사실을 확인하고,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청했다. 협회 관계자는 "그러나 A 감독이 '협회에서 알아서 처분하라'고 답했다"고 전했다. A 감독은 재임 기간 국제 대회 성적을 보면 당연히 재계약이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무산되면서 협회를 상대로 법적 대응까지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협회는 지난해 8월 A 감독, B 코치를 경찰에 고발하면서 법적 대응에 나섰다. 이 사건은 올해 2월 협회 대의원 총회에서까지 언급됐다. 이후 3월 해당 사건에 대한 수사는 종결이 됐다. 검찰은 A 감독에 대해서는 기소 유예, B 코치에 대해서는 무혐의 처분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협회가 이들에 대한 형사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견을 검찰에 전하면서 기소로 이어지진 않았다. A 감독은 밀반출된 셔틀콕 17박스를 반납하고, 다른 용품 2박스에 대해서는 현금으로 보전했다.
배드민턴 국가대표팀에 지원되는 셔틀콕. 요넥스 4월 임시 대의원 총회에서 협회는 "해당 코치진이 국제 대회에서 성과를 내는 등 배드민턴에 기여한 공로를 감안해 처벌 불원 의사를 전했다"고 해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협회 관계자는 "검찰 쪽에서 합의 여부를 놓고 먼저 연락이 왔고, 반출된 물품이 반환된 만큼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전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임시 총회에서 "스포츠인의 품위를 손상한 이들을 강력한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한 대의원은 "형사 처벌이 무산됐다고 무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면서 "스포츠인으로서 품위를 심각하게 훼손한 만큼 협회 차원의 징계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됐다"고 전했다.
이에 협회는 지난 6월 스포츠공정위원회를 열고 A 감독, B 코치에 대해 자격 정지 5년 정지 징계를 의결했다. 협회 관계자는 "만약 재임 기간이었다면 더 강력한 징계가 내려질 수 있었지만 임기가 끝난 뒤라 규정상 '품위 손상'에 대한 최대 징계를 줬다"면서 "절도나 사기 등은 형사 처벌 대상이라 협회 규정에는 없는 사항"이라고 설명했다.
A 감독은 재심을 청구하지 않아 징계가 확정됐다. 그러나 B 코치는 재심을 신청했고, 지난 8일 대한체육회 스포츠공정원회에서 4년이 경감돼 1년 자격 정지 징계가 확정됐다. A 감독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는 B 코치의 주장이 상당 부분 인정된 모양새다. 공정위에 참석한 한 관계자는 "B 코치가 변호사를 대동하고 나온 가운데 주범이 아닌 종범이라는 점, 검찰의 무혐의 처분 등 A 감독과 같은 징계는 너무 가혹하다는 의견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대한체육회 스포츠공정위원회 모습. 연합뉴스 B 코치는 징계 취소 소송 등 법적 대응을 검토하고 있다. B 코치는 "상하 관계가 분명한 코치진 위계 질서에 따라 감독님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면서 "단지 용품만 갖고 나와 어디로 가져다 주라고 하면 운반했을 뿐"이라고 억울한 심경을 전했다. 이어 "자격 정지는 현재 소속팀이 없는 상황에서 생계와 관련된 문제고, 징계 자체가 지도자 명예에 직결된 부분"이라면서 "감경된 부분은 고맙지만 소송 등 법적 대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일각에서는 협회 대응이 적절했는지에 대한 지적이 나온다. 범죄에 해당할 수도 있는 사건을 덮어줬다는 의견이다. 체육계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단순히 국가대표 선수촌에서 용품만 반출됐다면 관리 소홀일 수 있지만 이번 일은 엄연히 절도 범죄"라면서 "규정의 한계가 있다고 하지만 더 중한 징계가 내려졌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국가대표 물품 관리에 협회도 사각지대를 인식하고 조치에 나섰다. 협회 관계자는 "이전까지 국가대표팀 용품 사용과 관련해서는 코치진에게 일임해왔다"면서 "대표팀이 열심히 훈련하기 위해 용품을 사용한다는데 제한을 두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라고 전했다. 이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유소년 등에 지원된 셔틀콕은 사용 후 반납하도록 했고, 국가대표팀은 반납에 따른 이동이 어려운 만큼 빈 셔틀콕 케이스에 대한 증빙 자료를 제출하도록 관리를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대한배드민턴협회가 주관하는 승강제 리그에서 동호인들이 경기하는 모습(사진은 기사와 관련이 없음). 협회 배드민턴계에서는 언젠가 터질 것이 터졌다는 반응이다. 용품을 반출해 현금화하는 이른바 '깡'이 관행처럼 이어져왔다는 지적이다. 한 관계자는 "훈련이나 대회에 사용되는 셔틀콕의 경우 대량으로 소모되기에 수량 파악이 쉽지 않다"면서 "때문에 사용량을 부풀려 빼돌릴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짚었다.
국내외 대회에서 이런 식으로 빠져 나가는 용품이 상당했고, 이번 사태 역시 관행처럼 진행되다 적발이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한배드민턴협회에서 보직을 맡고 있는 모 지방배드민턴협회 C 사무국장도 비슷한 사건으로 검찰에 기소돼 지방협회에서 사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배드민턴협회 관계자는 "기소가 됐다면 보직 해임을 검토할 것"이라고 전했다. 다른 지방협회도 같은 사건이 벌어졌는데 물품에 대한 변상이 이뤄져 고발 없이 수습된 것으로 전해졌다.
A 감독은 현재 해외에 머물고 있다. A 감독은 "2024년 파리올림픽 이후 정신과 상담까지 받을 만큼 몸이 좋지 않았다"면서 "지금은 건강이 우선이라 한국을 떠나 해외에 있다"고 전했다. 이어 "협회와 문제가 있었던 부분은 원상 복구하고, 협회가 주장하는 일부 피해 부분까지도 보상했다"면서 "(재계약 무산 등) 협회와 관련된 부분은 언젠가 얘기할 날이 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2026 세계배드민턴연맹(BWF)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 2개와 동메달 1개를 수확하며 종합 1위에 오른 배드민턴 국가대표팀이 지난 8월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로 귀국해 기념 촬영하는 모습. 황진환 기자
한국 배드민턴은 현 국가대표 박주봉 감독과 협회 김동문 회장 등이 복식 전설로 자리잡고 '윙크 보이' 이용대(요넥스)가 탄생하면서 용품업체와 대형 계약이 성사돼 중흥기를 이뤘다. 여기에 최근 안세영이 역대 최고 선수의 길을 걷고 서승재-김원호(이상 삼성생명), 이소희-백하나(이상 인천국제공항) 등 남녀 복식에서도 성과를 내면서 황금기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수십억 원, 현금 및 용품 계약의 이면에는 관행처럼 검은 거래가 독버섯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선수들의 세계적인 수준에 걸맞는 투명한 용품 운용과 행정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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