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전두환 군사정권 시기 정보기관에 불법 구금돼 구타와 고문을 당하며 억울한 옥살이를 한 60대 남성에게 재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장은 제대로 된 선고를 하지 못한 선배들의 잘못에 대해 대신 사과하기도 했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형사4-2부(권혁중·황진구·지영난 부장판사)는 국가보안법·옛 반공법 위반 혐의로 지난 1983년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형이 확정됐던 김동현(68)씨에 대한 재심에서 42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장인 권혁중 부장판사는 재심 전 공소사실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하는 취지를 밝힌 후 주문을 낭독하기 전 "저로서는 40여 년이 지난 피고인에 관한 수사기록, 공판기록, 누렇게 변한 기록들을 보고 여러 생각에 잠겼다"며 "더구나 피고인이 미농지(황색 닥나무 종이)에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적어 나간 항소이유서와 상고이유서를 보며 그 안에 담긴 피고인의 절규와 호소, 좌절과 희망, 이 모든 것들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피고인은 아마 안기부에 끌려가 오랫동안 구속되고 고문당하면서도 이런 허위 자백은 인권 수호의 최후 보루인 법원에 가서 충분히 인정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이라며 "결국 피고인은 5년형 실형 살고 출소했고 국내에서 국보법 위반자라는 죄명만으로도 감시와 통제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판단에 조국을 떠나 이국에서 긴 생활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권 부장판사는 "호소를 단 한 번도 귀 기울여주지 못한 점, 피고인이 거의 자백을 고문·불법구금에 의해 할 수밖에 없었음을 과감히 인정하지 못했던 용기 없음, 80년대에 내려진 불법적 계엄이 헌법에 위반돼 무효라고 과감히 선언하지 못했던 소신 없음, 선배 법관들의 그런 잘못에 대해 대신 사과의 말씀드린다"며 "앞으로 이런 불법 계엄, 그로 인해 피고인과 같이 억울한 옥살이로 인해 청춘을 정말 어렵게 억울하게 지낸 일들이 다신 없도록 법관들로서도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우리들의 업무에 충실하겠다"고 말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헤드폰을 낀 상태로 재판을 받은 김씨는 권 부장판사의 말을 주의를 기울여 들었고 눈물을 닦아냈다. 권 부장판사는 "원심을 파기한다. 피고인은 무죄"라고 주문을 읽었다.
연합뉴스한편 지난 1980년 5월, 20대 대학생이었던 김씨는 자작 시집을 발표한 후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으로 검거될 것을 우려해 망명을 결심했다. 그는 약 2년 뒤인 1982년 4월 스웨덴으로 출국해 국제사면위원회 스웨덴지부에 망명을 신청했고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렸다. 이후 북한 대사관까지 방문하기도 했다.
1982년 5월 김씨는 한국대사관 설득으로 귀국했지만 옛 안기부(현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에게 곧바로 붙잡혔다. 김씨를 영장 없이 임의동행 방식으로 끌고 간 이들은 40일 간 불법으로 감금했다.
이후 영장이 발부된 김씨는 구속 기소돼 같은 해 12월 11일 1심에서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을 선고 받았다. 이듬해 4월 서울고법 항소심에서는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으로 감형됐고, 대법원이 7월 상고를 기각해 2심 판결이 확정됐다.
김씨는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구타와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했으며 2023년 진실규명을 결정한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도 이 같은 사실을 인정했다. 이후 김씨는 작년 1월 재심을 청구했고, 재판부는 같은해 12월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린 뒤 이날 무죄를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