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외벽 대형글판인 서울꿈새김판에 "해치야! 같이 책보자"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연합뉴스계절은 늘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침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하게 한다. 봄에서 여름으로 향하는 이 시기, 공기 속 습도는 조금씩 짙어지고 햇살은 더 뚜렷하게 내려앉는다.
바깥 풍경이 선명해질수록 마음속 풍경은 자주 흔들린다. 감성에서 열정으로, 부드러움에서 치열함으로 이행되는 이 전환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어쩌면 한 권의 책이다. 아니, 다섯 권의 책일지도 모르겠다.
나태주 시인의
'강물과 나는'(이야기꽃)은 그중 가장 조용히 말을 건네는 책이다.
시인은 "나는 강물과 함께 흘러가기로 했다"고 말한다. 물살처럼 바쁘고 거칠어진 일상 속에서도 강물이 끝끝내 길을 만들어 흘러가듯, 이 책은 계절의 변곡점에 선 우리에게 '조금은 느리게, 그러나 멈추지 말고' 흘러가라 말해준다. 시와 그림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이 책은 단지 감상의 산물이 아니라, 고요한 다짐처럼 읽힌다.
그 다짐이 삶의 현장으로 이어지는 지점에는
'세탁비는 이야기로 받습니다, 산복빨래방'(남해의봄날)이 있다.
부산 산복도로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공간과 사람, 그리고 시간이 한 데 섞인 이야기다. 청년들이 삶을 세탁기 안에 던져 돌리고 이웃들은 그것을 말린다. 이 책은 말한다. 결국, '좋은 이야기'는 '함께 사는 법'이라고.
각자의 사연이 모이고 섞여 마침내 햇볕 아래 널려질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계절이 바뀌고, 거리의 공기가 달라지는 가운데, 관계의 온도도 달라지지 않을까.
연합뉴스. 각 출판사 제공김겨울 작가의
'언제나 다음 떡볶이가 기다리고 있지'(세미콜론)는 이름부터 위로다. 이 책은 책에 대한 에세이이기도 하고, 삶에 대한 유쾌한 노트이기도 하다.
떡볶이라는 익숙하고 소박한 음식에 대한 애정이 독자로 하여금 잊고 있던 일상의 온도를 되새기게 만든다. "다음이 있다는 말이 좋다"는 저자의 말처럼, 봄이 끝나도 여름이 오듯, 눈앞의 것들이 지나가면 또 새로운 것이 온다는 믿음을 담고 있다. 이 믿음은 무엇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조금 더 진중한 사유로 들어가고 싶다면 은유 작가의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읻다)가 기다리고 있다.
이 책은 시와 번역이라는 두 세계를 넘나들며 우리가 잃어버린 '순수'에 대해 묻는다. 번역가들은 다른 언어를, 다른 세계를, 그리고 다른 마음을 자기 언어로 옮긴다. 그것은 마치 봄의 감성을 여름의 언어로 옮기는 작업과도 같다.
순수함은 결국 치열함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이 책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더럽혀지지 않기 위해, 더러움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하는 책,
'영원히 알거나 무엇도 믿을 수 없게 된다'(은행나무). 도시괴담이라는 외형을 갖춘 이 테마소설집은 사실 우리가 견뎌내고 있는 도시의 삶,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 침묵, 두려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어쩌면 가장 무서운 건 유령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작가들의 시선은, 차가운 공포를 통해 우리 사회의 이면을 응시하게 만든다. 이는 단순한 공포가 아니다. 여름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정직한 질문이기도 하다.
서울광장에 설치된 야외도서관 '책 읽는 서울광장'에서 시민들이 독서 및 휴식을 즐기고 있다. 연합뉴스
이 다섯 권의 책은 결국 하나의 메시지를 말한다. 삶은 여전히 흐르고, 계절은 멈추지 않으며, 우리는 그 안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것. 따뜻함을 지나 치열함으로, 들뜸을 지나 고요함으로, 우리는 전환의 시간에 서 있다. 그 시간을 살아가는 데 가장 좋은 도구가 문학이라면, 이 다섯 권의 책은 그 여정을 함께 걸어줄 믿을 만한 벗이 될 것이다.
꽃이 지고 태양이 뜨거워지는 이 시기, 당신이 잊고 있던 감정과 마주하고 새로운 열정에 몸을 맡기기 전에 이 책들을 통해 한 번쯤 내면을 들여다보기를 권한다. 그러면 계절이 말 없는 방식으로 당신에게 말을 걸어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