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성 씨가 자신의 은둔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강지윤 기자▶ 글 싣는 순서 |
①빚 노트, 소주병 덩그러니…고독하게 떠난 청년 소연씨의 '흔적' ②[르포]쓰레기 속 웅크린 청년들…닫힌 방 안에 외로움이 쌓인다 ③빈 주머니에 다시 방문 닫는다…'은둔 중년' 될까 걱정만 (계속) |
"마흔이 코 앞인데…. 그때 그 회사에 안 갔더라면 달랐을까 답답하죠."
초단기노동자 김민성(37·가명) 씨는 삶이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느껴질 때면, 지난 2016년을 떠올린다. 꽤 유명한 기업의 영업직으로 입사했던 그는 취업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실적 압박과 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렸다. 출근하겠다고 집을 나선 후 동네만 맴도는 날도 생겼다. 결국 그는 퇴사했다.
한 번의 실패였는데 삶 전체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의욕적으로 재취업을 준비했지만, 면접이 잡혀도 가지 못했다. "대인공포증이 심해져 인간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어요. 또 누군가 나를 괴롭히지 않을까 겁만 났고요." 길 걷는 사람의 시선에도 위축되는 수준에 이르자 민성 씨는 외출을 포기했다.
방문 너머로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렸던 어느 밤, 민성 씨는 세상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거리를 늘려가며 외출을 연습했다. 지역공동체일자리·공공근로사업, 초단기 노동 등을 통해 사회의 문도 두드렸다. 고립·은둔 지원 단체의 모임 프로그램에 참석해 마음의 상처도 차근차근 회복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 그는 다시 고립의 문턱에 섰다. 이번엔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이름으로.
냉정한 취업시장은 고립·은둔 청년이 회복에 걸린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최근 신용회복위원회에 채무조정을 신청했어요. 학자금 대출이 조금 남았는데 갚을 형편이 안 돼서요. 물류센터, 청소 등 안 해본 일이 없는데 경기가 어려워 요즘은 일을 구하기 힘드네요. 미래를 생각하면 두통이 일어요."
무엇이 청년들을 방 안에 가뒀나…"취업 어려움" 1위
AI 생성 이미지국무조정실이 지난 3월 발표한 '2024년 청년의 삶 실태조사'에 따르면,
'거의 집에만 있는 상태'의 고립·은둔 청년 비율은 전체 청년의 5.2%에 달했다. 이는 2년 전 조사 당시보다 2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집 밖에 전혀 나오지 않는 청년도 0.9%에 달했다.
청년들은 왜 스스로를 방 안에 가뒀을까?
'취업의 어려움' 때문이라는 응답이 32.8%로 가장 많았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11.1%, '학업중단'이 9.7%로 뒤를 이었다.
백종우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며 기대에 부합하는 일자리가 줄어든 것"이 고립·은둔 청년이 증가한 배경 중 하나라며, "청년들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대신 구조적 고착에 순응하며 소비를 줄이는 등의 위축된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광범위한 '취업 이탈 청년'도 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구직 활동에 나서지 않은 '쉬었음' 청년은 지난 5월 기준 39만 6천명에 달했다. 이들 중 다수가
취업 공백을 극복하지 못한 채 고립 상태로 진입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김아래미 서울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기본적인 사회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소득이 필요하지 않나"며 "특히 청년들의 경우 (미취업 상태가 길어질 경우)
박탈감이나 불편함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를 피하고 고립·은둔 상태에 빠지게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너무 높은 취업의 벽…맞춤형·장기형 '일경험' 필요
청년재단에서 청년을 위한 맞춤형 일경험 프로그램 '청년 On&Up(온앤업)'을 진행하고 있다. 청년재단 제공고립의 원인이 '취업의 어려움'이었다면,
회복의 열쇠 역시 '일자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고립·은둔을 겪은 청년들에게 일반 취업시장의 진입장벽은 높다.
사회적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크고, 반복된 실패로 인한 심리적 위축, 낮은 에너지 수준 등으로 인해 기존 노동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이 때문에 취업 이전 단계의
'일경험'은 중요한 디딤돌이 된다. 일경험이란 진로설계, 직무교육 등 청년이 노동시장 진입 전 실무 역량과 적응력을 키우는 활동을 의미한다. 청년들은 자기효능감을 회복하고 고립의 주요 원인을 예행연습해 재고립 위험을 낮춘다.
현장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이 나온다. 박재영 청년재단 이음사업팀장은 "
정서 지지 프로그램 출석률은 60% 남짓인데, 일 경험 프로그램은 99%에 달한다"며 "청년들이 사회에서 쓸 수 있는 기술을 배운다는 점에서 불안을 해소하고 흥미를 느낀다"고 말했다.
고립·은둔청년 전담 센터인 인천 '청년미래센터'에 '청년도전지원사업' 포스터가 붙어있다. 강지윤 기자정부 역시 일 경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2023년 관계부처 합동으로 '고립청년 종합지원대책'을 발표하며 '청년도전지원사업', '청년성장프로젝트' 등 다양한 일경험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미취업 청년 등을 일괄적으로 포함하는 단기 프로그램에 그친다. 고립·은둔 청년의
특성과 회복과정을 고려한 맞춤형·장기형 일경험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사단법인 씨즈 이은애 이사장은 "청년 고립·은둔 현상은 원인도, 경과도 매우 다양하다"며 "단기 고립 청년은 기존의 고용노동부 사업으로 충분하지만, 취업 경험이 없거나 발달적 어려움이 있는 청년에게는 적합한 일 경험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은둔한 시간만큼 회복에도 시간이 필요한데, 민간은 자원 한계로 3~4개월짜리 프로그램밖에 만들 수 없다"며 "
정부가 1년 정도의 장기 일경험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청년들이 몇 차례 사다리를 타고 사회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고 강조했다.
일경험 이후 일자리로 이어지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단법인 파이나다운청년들 이사장 김혜원 호서대 청소년문화상담학과 교수는 "지금은 단기 일경험 이후 이들을 일자리로 연결해 주는 구조가 없어 청년들이 (일경험이라는) 중간지대에만 머물고 있다"며 "정책이 결국은 일자리 연계로 가야한다"고 짚었다.
日 '취업빙하기 세대' 중년 히키코모리…우리나라도?
일본의 50대 히키코모리. NHK 보도화면 캡처일각에서는 지금 적절히 대응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고립·은둔 청년의 장기화와 고령화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현재 일본은 80대 노부모가 50대 고립·은둔 자녀를 부양하는 이른바 '8050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일본의 '취직 빙하기 세대'는 히키코모리의 장기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90년대 버블 경제 붕괴 이후 경기침체기에 대학을 졸업해 혹독한 취업난을 경험한 이들 중 다수는 정규직과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고립·은둔에 빠졌다.
일본의 히키코모리 지원센터 NPO 'good!'은 이에 대해 "일본은 한 번
사회의 레일에서 이탈하면 다시 돌아갈 기회를 만들기 어렵다"며 "부모가 체면 등의 문제로 자녀가 '은둔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도 장기화의 원인"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도 일본의 전철을 밟게 될까? 전문가들은
고립·은둔 청년 대책이 이제 막 첫 발을 뗀 단계라며, 방향만 제대로 잡는다면 일본과 같은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보건복지부의 '2023고립·은둔 청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고립·은둔 기간 '1~3년 미만'이 26.3%로 가장 많았고, '3~5년 미만'(16%),
'3개월 미만'(15.4%)이 그 뒤를 이었다. 아직
상당수는 고립·은둔의 초기에 해당한다.
김아래미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실태조사 등을 보면
우리나라 청년들은 도움요청에 굉장히 적극적"이라며 "이제 막 정부의 개입이 시작됐기 때문에 제대로 지원 한다면 일본과 같은 장기 고립 상황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은애 이사장도 "수천 명의 청년을 만나본 경험상, 변화의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다"며 "'일상회복'을 목표로 하던 청년들이 주 3회씩 5시간 정도 대화모임이나 집밥모임 등에 참여하고 나면 3~4개월 안에 목표가 '일경험', '취업 준비'로 바뀐다"고 설명했다.
청년들이
집중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공간과 프로그램이 제대로만 설계된다면, 변화는 훨씬 더 빨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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