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미국 정부가 앤트로픽의 최상위 인공지능(AI) 모델인 '미토스 5(Mythos 5)'와 '페이블 5(Fable 5)'에 대한 외국인 접근을 전면 차단하면서 소버린(주권) AI 필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이번 조치가 단순히 한 기업의 서비스를 제한한 것이 아니라 AI가 반도체처럼 국가 안보와 직결된 전략 자산으로 관리되기 시작했다는 신호라고 평가했다. AI 경쟁의 초점이 단순한 성능 경쟁을 넘어 접근권과 통제권을 둘러싼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AI도 전략자산 시대…"선택 아닌 안보 문제"
16일 앤트로픽과 외신 등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지난 12일(현지시간) 외국 국적자의 '페이블 5'와 '미토스 5' 접근을 전면 중단하는 수출 통제 지침을 내렸다. 두 모델은 앤트로픽이 개발한 차세대 최상위 AI 모델로, 추론과 에이전트 기능이 크게 강화된 최신 플래그십 모델이다.
이번 조치는 AI 기술 경쟁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지금까지 미국이 첨단 반도체와 제조장비를 중심으로 수출 통제를 해왔다면, 이제는 최첨단 AI 모델 자체를 전략 자산으로 보고 통제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미국 매체 악시오스는 "한 기업을 대상으로 한 조치이지만 업계 전반에 걸쳐 더 광범위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고 진단했고, 블룸버그통신도 "오픈AI, 구글, 메타를 포함한 모든 주요 AI 개발사에 선례를 남길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미국은 첨단 반도체와 장비 수출을 통제해왔지만, 최첨단 AI 모델 자체를 규제한 것은 사실상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이번 조치가 국내 산업에 미칠 영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과기부 관계자는 "지속적으로 앤트로픽 측과 소통하며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세계 각국 AI 자립 경쟁 촉발 가능성
미국이 AI 기술 수출 통제를 강화하면서 해외 AI 모델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 사이에서는 핵심 AI에 대한 접근이 언제든 차단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공공 행정과 국방, 의료, 연구개발 등에 AI 활용이 빠르게 확산되는 상황에서 특정 국가나 기업의 정책 변화만으로 핵심 AI 서비스 이용이 제한될 수 있다는 점이 주목받고 있다. 생성형 AI가 단순한 업무 보조 도구를 넘어 국가 핵심 인프라의 일부로 편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자국 AI 기술과 인프라를 독자적으로 확보하는 '소버린 AI(Sovereign AI)'의 중요성도 다시 부각되고 있다.
안도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 교수는 "소버린 AI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안보의 문제"라며 "핵심 AI 역량을 특정 해외 공급원에만 의존할 경우 공급이 끊기는 순간 행정·산업·연구 전반이 멈춰 설 수 있다"고 말했다.
이상엽 한국과학기술원(KAIST) 생명화학공학과 특훈교수도 "이번 사태를 통해 AI가 국가전략물자처럼 자국 이익에 따라 통제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다시 확인됐다"며 "국방·의료·연구·행정 분야의 AI 시스템은 해외 접속이 끊겨도 운영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기영 전 과기부 장관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각국의 AI 자립 움직임이 가속화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미토스 5와 같은 고성능 AI 모델은 해킹이나 시스템 교란에 활용될 수 있는 반면 취약점을 찾아 방어 체계를 강화하는 데도 활용될 수 있다"며 "이 같은 모델을 한 국가가 독점하는 것은 다른 국가들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은 물론 프랑스, 캐나다 등 독자적인 AI 개발 역량을 갖춘 국가들은 자체 모델 개발에 더욱 많은 투자와 노력을 기울이게 될 것"이라며 "한국도 최고 수준의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조치가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AI 패권을 약화시키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의 통제가 전 세계적인 반발과 기술 자립 움직임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남국 서울아산병원 융합의학과 교수는 "최첨단 AI 모델이 국가 전략 자산으로 분류돼 언제든 접근이 차단될 수 있다는 사실이 전 세계에 각인됐다"며 "이번 조치는 세계 각국의 AI 개발 경쟁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미국의 대(對)중국 첨단 반도체 수출 규제가 중국의 자체 반도체 개발을 자극했던 것처럼 이번 조치 역시 각국의 AI 독립 움직임을 촉진할 가능성이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향후 글로벌 AI 생태계가 미국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다양한 국가와 기업이 참여하는 다극 체제로 재편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소버린 AI 해법…한국 처한 현실도 고려해야
다만 자원이 한정된 상황에서 미국 빅테크와 정면 대결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전문가들은 무조건적인 원천기술 개발에 매몰되기보다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실리적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박한우 영남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모든 국가가 미국 수준의 초거대 파운데이션 모델을 독자 개발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라며 "국가 차원의 데이터 자산 확보와 공공 AI 인프라 구축, 오픈소스 모델 활용, 특정 산업에 특화된 도메인 모델 개발 등이 더 현실적인 전략일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 AI 서비스 상당수는 미국 빅테크의 파운데이션 모델에 기반해 운영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해외 모델을 적극 활용하되 특정 기업이나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국내 데이터와 응용 서비스 경쟁력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실제로 정부는 최근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국내 AI 모델 생태계 육성에 나서고 있다. 공공 분야를 중심으로 국산 AI 모델 활용을 확대하고 데이터·GPU·AI 인재 확보 정책도 병행 추진 중이다.
결국 이번 사태는 AI 경쟁의 초점이 단순한 성능 경쟁을 넘어 접근권과 통제권의 문제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라는 평가다. 과거에는 더 뛰어난 AI를 누가 먼저 개발하느냐가 경쟁의 핵심이었다면, 앞으로는 누가 AI를 통제하고 누구에게 사용할 권한을 부여하느냐가 새로운 경쟁의 핵심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AI가 국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으면서 소버린 AI 논의 역시 기술 개발을 넘어 디지털 주권의 문제로 확대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