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성폭력·아동 학대·장애인 학대 등 범죄 피해자를 지원하는 피해자 국선변호사들이 보수 청구 절차에 드는 행정 부담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피해자 상담부터 수사기관 조사 동석, 재판 출석까지 공익적 성격이 강한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이에 대한 보수를 받기 위해서는 각종 내역을 일일이 모아 증빙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선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좋은 마음으로 국선변호사를 지원했는데 이같은 행정 업무에 치이니, 차라리 보수 청구를 포기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피해자들도 전문적인 법률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국가가 만든 제도지만, 현장에서는 과도한 증빙 절차가 오히려 제도 운영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3년 치가 밀렸어요" 서류 작업 산더미
피해자 국선변호사 제도는 성폭력·아동 학대·장애인 학대·인신매매 등 범죄 피해자와 성매매 피해 아동·청소년이 사건 발생 초기부터 수사, 재판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전문적인 법률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2012년에 도입됐다.
피해자 국선변호사는 대한법률구조공단 소속 전담 변호사와 일반 변호사들이 일정 교육을 이수한 뒤 자발적으로 신청해 활동하는 비전담 변호사로 나뉜다. 법무부에 따르면 올해 6월 기준 피해자 국선변호사는 총 628명으로, 전담 변호사 45명·비전담 변호사 583명이다. 피해자 국선 업무 상당 부분을 비전담 변호사들이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비전담 피해자 국선변호사는 월급을 받는 전담 변호사와 달리, 수행한 업무별로 보수를 지급받는다는 점이다. 활동 하나하나를 일일이 기록하고 청구해 돈을 모아야 하는 구조인 것이다.
피해자 대면 상담 30분 이상은 회당 10만 원, 전화상담 총 30분 이상은 10만 원, 문자 상담 6페이지 이상은 10만 원, 의견서 제출은 회당 10만 원, 경찰 조사 참여는 회당 20만 원, 공판절차 참여는 회당 10만 원 등이다. 여기에 사건 진행 단계별 기본 업무를 모두 수행하면 추가 보수가 붙는 구조다.
사건 하나가 종결되면 일정한 보수가 지급되는 피고인 국선변호사 제도와는 다르게, 이 모든 과정을 비전담 국선변호사는 일일이 증빙해 청구해야 한다.
비전담 피해자 국선 변호사 보수기준표. AI 생성 이미지수도권에서 5년째 피해자 국선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는 변호사 A씨는 "업무가 너무 번잡스러워 사실상 3년 치가 밀렸다"며 "경찰 조사에 동석하면 조서에 이미 서명과 날인을 하는데도 별도로 출석 확인서를 들고 가서 수사관 서명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 종이를 잃어버리면 다시 입증할 방법도 없다"며 "상담 자료와 출석 확인서, 각종 기록을 모아 서류로 정리하는 데만 반나절 이상 걸린다"고 토로했다.
2년 넘게 피해자 국선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는 또 다른 변호사 B씨는 "특히 피해자분들은 대면 상담 자체를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아 문자나 카카오톡으로 연락하는 일이 적지 않다"며 "피고인 국선 사건보다 민원성 연락도 많아 새벽에도 연락이 오는 경우가 있는데, 몇십 페이지에 달하는 대화 내용을 일일이 캡처해 뽑아서 제출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건을 처리하는 것보다 자료를 만드는 데 더 많은 에너지가 들어간다고 느낄 때가 있다"며 "회당 10~20만 원 받으려고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고 덧붙였다. 일반 사건은 국선 사건 보수보다 수임료 등이 훨씬 높은 게 현실이다.
심지어 보수를 청구해야 하는 기한도 정해져 있다. 현행 법무부령에 따르면 피해자 국선변호사는 사건 종결 후 30일 이내에 비용 명세서와 소명자료 등을 첨부해 보수 지급을 신청해야 한다. 하지만 변호사들은 사건 종결 사실 자체를 제때 통지받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 이같은 규정 역시 현장에서는 큰 장애로 작용한다고 한다.
피해자 돕다가도 '현타' 온다
결국 부담스러운 행정 절차로 인해 피해자들의 법률 구제를 위해 손해를 무릅쓰고 나섰던 국선변호사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다.
일반 변호사들은 개인 사건과 피해자 국선 활동을 대부분 병행한다. 국선 업무에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보수 수준은 상대적으로 높지 않은 편이라 서류 업무에 치일 때면 일명 '현타'가 온다고 한다.
A씨는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해서 맡고 있다"면서도 "전산으로 처리할 수 있는 부분까지 모두 변호사가 직접 증빙하도록 하다 보니 일을 할수록 허탈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비전담 피해자 국선변호사 지원 건수는 2023년 2만8870건, 2024년 2만8040건, 2025년 2만6150건이었다. 연도별 활동 변호사 수를 고려하면 1인당 연간 40~50건 안팎의 사건을 맡는 셈이다.
보수 지급 총액은 2023년 54억1천만 원, 2024년 63억6천만 원, 2025년 62억 원 수준이었다. 단순 계산하면 지난해 기준 건당 평균 지급액은 약 23만 원 수준이다.
전체 피해자 국선변호사 현황. AI 생성 이미지대한변호사협회 국공선변호사회 회장을 지낸 신수경 변호사는 "저연차 변호사들은 형사사건 경험을 쌓기 위해 맡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면 굳이 계속할 이유를 찾기 어려워져 이탈하기도 한다"며 "사실상 봉사 성격이 강한 활동을 자발적으로 맡는 변호사들을 심리적으로 소모시키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이어 "최소한 경찰 조사 동석 같이 전산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자동으로 처리하는 등 청구 절차를 간소화하고 개선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법무부는 CBS노컷뉴스에 "피해자에게 실질적인 법률 조력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수행한 업무의 내용과 정도를 반영한 보수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며 "다만, 보수 청구를 위한 증빙자료 준비 과정에서 비전담 피해자 국선변호사의 행정부담이 발생할 수 있다는 현장의 의견도 인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비전담 피해자 국선변호사의 행정부담을 경감하고 보수 청구 절차의 효율성과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피해자 국선변호사 선정 및 보수 청구 전산시스템 도입을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또, 한 달 내 보수 청구 규정과 관련해서는 "보수 지급 신청이 지나치게 지연될 경우 소명 자료 확보나 자료의 진위 판단이 어려워지는 등 문제가 있어 둔 규정이지만, 해당 신청 기한이 지났다고 보수 지급 청구권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