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한 남북의 경계. 연합뉴스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달 열린 당 전원회의의 결론 중 하나로 "현재 추진 중에 있는 남부국경 요새화 공사를 질적으로 완결"할 것을 지시했다.
"한국을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공인한 우리 당의 대적투쟁 원칙을 철저히 견지해야한다"는 대원칙 아래 올 하반기 군사 과업으로 '남부국경 요새화 공사의 완결'을 지시한 것이다.
북한은 적대적 두 국가를 제기한 뒤 지난 2024년 4월부터 군사분계선 이북지역에서 철책과 방벽 설치, 도로구축, 지뢰매설 등을 통한 남부국경 요새화 공사를 진행 중이다.
군 당국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군사분계선의 약 74% 길이에 북한의 국경선화 공사가 완료됐으며, 올 4월부터 공사가 재개된 것으로 파악됐다.
김 위원장이 당 전원회의에서 '공사 완결'을 지시한데다, 이런 공사에 대해 유엔사는 우리 정부와 달리 '정전협정 위반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에, 북한의 작업은 속도를 내 올해 안에 끝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연합뉴스
지난 1953년 7월에 체결된 정전협정은 한반도 군사분계선(MDL)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각각 2km, 총 4km 폭의 비무장지대를 뒀다. 교전 재개를 막기 위해 남북 양측에 완충지대를 설정한 것으로, 해당 지역에서는 당연히 적대행위와 군사시설 설치, 병력과 장비 운용 등이 엄격히 통제됐다.
그런데 남북의 긴장이 크게 고조됐던 1960년대 후반부터 북한의 철책 경계선이 지역에 따라 점점 남쪽으로 내려와 군사분계선 전방 1km 정도에 이르렀고, 이에 대응해 남한의 철책도 같은 거리로 북상해 비무장지대의 폭이 크게 축소된 바 있다.
이후 수 십 년 간 큰 변화가 없었으나 이번에 북한이 국경 요새화 공사를 하면서 철책 경계선을 더 남하시킨 것이다.
군 당국에 따르면 일부 구간의 경우 북한의 철조망이 군사분계선에서 80-90m가량 떨어진 정도로 가까이 설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군사분계선 북측지역의 완충지대가 사실상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비무장지대(DMZ)를 설정해 이를 완충지대로 함으로써 적대행위의 재발을 초래할 수 있는 사건의 발생을 방지한다'는 정전협정 1조 1항에 비춰볼 때 북한의 '국경 요새화' 공사는 정전 협정 위반에 해당한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입장이다.
반면 유엔사는 지난 달 24일 설명 자료를 통해 북한의 공사가 군사분계선에서 100m의 이격거리를 두고 이뤄지고 있고, 중화기 반입이 이뤄지지 않았으며, 방어 목적의 지뢰 매설은 허용된다는 이유 등으로 협정위반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군사도로의 조성, 그 앞 남쪽으로의 방벽과 철조망 전진 설치, 철조망 인근의 불모지 조성 및 지뢰 매설 등으로 구성되는 '국경 요새화' 공사가 앞으로 완료된 뒤에도 과연 병력 배치 등이 없이 이른바 '방어적 성격'이 유지될지는 미지수이다.
북측의 완충구역이 사라진다는 자체가 군사분계선 일대에서의 우발적 충돌 가능성을 높인다는 지적도 있다. 비무장지대의 공간적 구조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김태원 통일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주목할 점은 북한이 이런 조치를 정전협정과 유엔사 체계를 완전히 벗어나서가 아니라 그 틀을 이용하거나 우회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추진한다는 점"이라며 "북한은 유엔사·북한군 통신선을 통해 DMZ 일대의 작업재개를 통보하면서 겉으로는 협정과 절차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이를 통해 DMZ의 실제 역할을 완충지대에서 국경선·경계선 관리 공간으로 점차 변형시키려는 전략을 택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유엔사가 홈페이지에 게재한 설명자료. 연합뉴스국방부는 지난해 11월 북한의 공사 과정에서 군사분계선을 침범하는 사례가 늘자 군사분계선 획정을 위한 남북 군사당국간 회담을 유엔사 등을 통해 북한에 제의한 바 있다.
정전협정 체결 당시 한반도를 가로질러 군사분계선을 표시했던 1292개의 말뚝이 긴 세월 속에 유실되고, 이에 따라 남과 북, 유엔사 3자간에도 정확한 군사분계선을 둘러싸고 측정 차이가 있는 만큼 회담을 열어 이 문제를 논의하자는 제의였다.
그러나 북한은 '적대적 두 국가' 정책에 따라 회담 제의에 아무런 응대를 하지 않았고, 결국 북한의 공사가 계속 돼 올해 내 공사 완료를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북한이 앞으로 '국경 요새화' 공사를 완료한 뒤 "국경선에서 경계 작전을 수행하게 되면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를 규정한 정전협정이 사실상 무력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남북의 긴장이 고조되면 유엔사의 관리책임 문제 등 국내적으로도 아주 다양한 논란이 우려된다.
따라서 유엔사에 사안의 심각성을 환기시켜 적극 나서도록 설득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조용근 경남대 교수(예비역 준장)은 지난 달 29일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이 주최한 포럼에서 "정전협정 유지와 관리 책임은 유엔군사령관에 있음을 명확히 주지시켜 유엔사에서 북한의 군사분계선 국경선화에 대한 입장 표명과 함께 유엔사·북한군간 장성급 회담개최를 공개적으로 북한에 제안하도록 설득해야한다"고 제언했다.
조 교수는 "유엔사와 북한군 장성급 회담이 열려도 국경선화에 대한 북한의 입장이 본질적으로 변화하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우발적 군사 충돌 방지대책을 중점적으로 협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북한은 지난 1994년 4월 군사정전위원회 기능중지 통보를 시작으로 2년에 걸쳐 중국 군사정전위원회 대표단 철수, 중립국감독위원회 폴란드 대표단 본국소환, 판문점 무력시위 등 정전협정을 무력화하는 다양한 시도를 했다. 그러나 1996년 4월 13일 정전협정 유효 선언을 한 뒤 1998년 6월 유엔사와 처음으로 장성급 회담을 여는 등 모두 16차례 회담을 한 바 있다. 유엔사와 북한군의 장성급 회담에는 한국군 장성도 회담대표로 참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