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MBC '하얀거탑'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안판석 감독'하얀거탑' '밀회' '풍문으로 들었소' 등의 작품을 연출한 안판석 감독이 지난 12일 세상을 떠났다. 지난달 뇌출혈로 쓰러진 후 치료를 받아오던 중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향년 65세.
1961년생인 안판석 감독은 MBC 드라마 PD 출신으로 '짝' '예스터데이' '수줍은 연인' '장미와 콩나물' '아줌마' '현정아 사랑해' '흥부네 박터졌네' '하얀거탑' '아내의 자격' '세계의 끝' '밀회' '풍문으로 들었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봄밤' '졸업' '협상의 기술'을 연출했다. 오는 10월 시작하는 드라마 '연애박사'가 유작이 됐다.
무려 163부작에 달하는 김혜수 주연작 '짝'으로 서서히 입지를 다져가던 안 감독은 최진실 주연의 주말드라마 '장미와 콩나물'로 주목받았다. 화려한 장밋빛 젊음이 결혼 이후 점차 콩나물처럼 변해가는 여인들의 삶을 사실감 있게 담은 가족 드라마다. 안 감독이 그의 작품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콤비'인 정성주 작가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 시청률 30%를 넘기며 큰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 '아줌마'는 안판석-정성주의 조합이 풍자적 성격의 블랙코미디를 얼마나 잘 표현할 수 있는지를 입증했다. 가부장적인 집안의 순종적인 전업주부가 자기 삶을 돌아보고 변신하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리는 '아줌마'는 원미경이 맡은 주인공 오삼숙보다, 그의 남편 장진구(강석우) 역이 오래 회자한 독특한 경우다.
실력이 없어 돈으로 대학 교수직을 사고도 전업주부인 아내를 '못 배우고 모자라다'라며 끊임없이 무시하고 하찮게 여기는 것은 기본, 젊었을 때부터 흠모하던 동료 한지원(심혜진)과 불륜까지 저지르는 장진구는 그 '뻔뻔함'으로 시청자들에게 남부럽지 않을 만큼 욕을 먹었다. 한때 '장진구 같은 놈!'이라는 말이 유행어로 만들어졌을 정도다.
'아줌마'는 장진구 캐릭터를 통해 소위 '먹물'로 분류할 수 있는 386 지식인의 지독한 속물근성과 허위의식을 낱낱이 드러냈다는 평을 받는다. 남편에게는 내내 구박받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결국 홀로서기에 성공하는 오삼숙의 삶을 그린 '아줌마'는 지난 2005년 21세기 여성미디어네트워크가 선정한 평등미디어상 으뜸상을 차지한 바 있다.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기자간담회 당시 안판석 감독. JTBC 제공2007년 방송한 '하얀거탑'은 일본에서 이미 큰 인기를 끈 원작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였다. 대학병원을 배경으로 한 천재 의사의 야망을 향한 끝없는 질주와 종말을 다룬 '하얀거탑'은 탄탄한 줄거리와 긴박감 넘치는 연출, 김명민을 필두로 이정길, 김창완 등의 호연이 어우러져 '웰메이드'(명작)로 큰 사랑을 받았다.
본격 '의학 드라마'였던 '하얀거탑'은 생명을 대하는 태도와 삶의 목적을 두고 대립하는 장준혁(김명민)과 최도영(이선균)의 대립을 그려, 다양한 인간군상을 표현했다. 권력을 향한 암투와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고, 로맨스는 과감히 걷어낸 점도 특기할 만하다.
안 감독은 제작발표회 당시 "기존 해외 원작 영화나 드라마의 실패가 내용의 기술적 변화만을 주다가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는 원작을 우리 식에서 재해석해서 우리 현실에 맞게 만들었다"라고 설명했다.
흥행작 '아줌마'로 시작한 안판석-정성주 조합은 특히 많은 애청자를 모았다. 이들은 2010년에 초중반 '아내의 자격' '밀회' '풍문으로 들었소'까지 연속으로 세 작품을 함께하면서 물오른 '글'과 '연출'로 호평받았다.
자녀 교육에 모든 것을 건 대치동 주부가 우연히 만난 치과의사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그린 '아내의 자격', 성공만을 위해 달려온 예술재단 실장과 자기 재능도 모른 채 살아온 천재 피아니스트의 나이 차를 초월한 멜로 '밀회', 미성년자인 미혼모 부와 혈통의 세습을 꿈꾸는 대한민국 초일류 상류층의 속물 의식을 통렬하게 꼬집은 블랙코미디 '풍문으로 들었소'는 안판석-정성주의 '보장된 명작'으로 꼽힌다.
2010년대 후반에는 손예진-정해인의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한지민-정해인의 '봄밤', 정려원-위하준의 '졸업'까지 세 작품 연속으로 로맨스와 멜로 장르에 집중했다. 안 감독이 '여성' 캐릭터에 더 신경을 썼던 시기다.
지난 2019년 MBC 드라마 '봄밤'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안판석 감독. 황진환 기자'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기자간담회에서 안 감독은 "드라마의 주인공은 한 명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윤진아(손예진)다. 윤진아의 성장기를 그리는 거다. 거기에 서준희(정해인)가 딸려 들어오는 거다. 서준희의 성장기는 타자로서 편린으로 보여주게 될 것 같다"라고도 했다.
일할 때는 프로답지만, 사적인 영역에서는 부모에게 쩔쩔매거나, 전 남친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연인 서준희에게 기대는 윤진아도 결국 조금씩 각성하고 성숙하게 되니, 그의 성장을 지켜봐 달라는 게 안 감독의 이야기였다.
안 감독은 "뭐가 어떤 점에서 성장한 건지, 사랑에 있어서 중요한 건 뭔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을 끝까지 지켜봐 달라"라며 "누가 시원하게 평을 해 달라. 악평이라도 듣겠다"라는 말로 어떤 반응에도 열려있는 태도를 강조했다.
'봄밤' 제작발표회에서는 "이번에도 여자가 더 중요하다"라며 "남자도 어떤 개인적인 고통이 있고 여자도 개인적 고통이 있는데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 여자들이 살기 힘들다.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 소설을 하면 살기 힘든 사람이 주인공이 된다. 그래서 여자가 주인공"이라고 설명했다.
대치동 스타 강사와 그의 제자가 사랑에 빠진다는 '사제 로맨스'였던 '졸업'은 만만치 않은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학원 선생님이었던 등장인물에서 시작해 이를 좁히고 좁혀 '대치동 학원가의 선생님들'로 정리한 후 비로소 완성됐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촬영 현장에서 안판석 감독이 배우들과 모니터 중이다. JTBC 제공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스타일은 '졸업'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안 감독은 "실제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고민하면서 만들었다. 그렇게 표현되길 바랐고, 그렇게 이뤄냈다"라고 자평했고, 특히 박경화 작가의 대본을 두고는 "조연 한 명 한 명까지 모두 완전히 살아있었다. 주연, 조연, 단역이 다 빛이 나는 대본이었다"라고 밝혔다. "나중에는 (대본에) 빨려갔다"라는 그는 "끝날 때쯤 되니 배우들의 본명을 잊을 정도"라고 덧붙였다.
뛰어난 연출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안 감독은 두말할 필요 없는 베테랑 PD였다. '협상의 기술' 제작발표회 당시 장현성은 안 감독을 '선장' 에 비유했다. 장현성은 "극 중 어떤 싸움이든 분명히 이유를 말씀해 주시는 선장이 있다. 나침반이 정확하다. 정교하게 세공된 설계도를 보신다고 생각해도 좋다"라고 말했다.
동시에 안 감독은 드라마를 만드는 '현장의 건강함'도 두루 살피는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안 감독의 드라마 촬영 현장에는 '인권'이 있었다.
손예진은 "드라마라는 작업이 워낙 힘들고, 그래서 내가 과연 몇 개월 동안 잘할 수 있을까 걱정과 우려가 많이 됐다"라면서도 "워낙 배우들 사이에서는 (안판석) 감독님에 대한 미담이 굉장하다. 같이 작업했던 분들은 다 엄지손가락 치켜드는 분이라서 결국 선택했다. 앞으로 감독님 말고는 다른 감독님이랑 (작업을) 못할 것 같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배우들은 CBS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너무 좋은 현장이었다'라고 입을 모았다. 주민경은 "안 감독님은 이번에 처음 현장에서 뵙는 거였는데, 소리 한 번 안 지르셔도 포스가 있으셨다. 누군가를 압박하는 게 아닌데도 평온하고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었다"라고 밝혔다.
tvN '졸업' 제작발표회 현장 사진. 왼쪽부터 안판석 감독, 배우 정려원, 위하준. tvN 제공또한 주민경은 "고성, 욕설 한번 없었고 찡그린 표정 하는 분도 하나 없었다. 제가 신인이라 현장 분위기가 험악하면 주눅 들기 마련인데 '천천히 해. 네가 준비해 온 것 다 해 봐' 하시니, 촬영장 가는 게 너무 신났고 끝나고도 집에 가기 싫어서 계속 주변을 맴돌았다"라고 부연했다.
영화 '국경의 남쪽'부터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까지 여섯 작품을 함께해 온 장소연은 "(작품을) 거듭할수록 예전보다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가는 걸 지향하셨다"라며 "최대한 콤팩트하게 찍고 충분히 휴식할 시간을 마련해주셨다. 그러면 배우들, 스태프들이 더 좋은 컨디션으로 할 수 있으니까"라고 전했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다음 작품인 '봄밤' 제작발표회에서도 안 감독은 "밤샘 촬영에 대해 신경 쓰고 있다. 밤새도록 일을 하고 잠도 못 자고 또 다음날 일을 시작하려면 나도 힘들다"라며 "그동안 (문제가 됐던) 드라마 밤샘 촬영, 인권 문제들이 이제 사회적 화두가 된 만큼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고인의 유작은 오는 10월 ENA에서 방송 예정인 '연애박사'다. 고등학교 때 수영선수였지만 병으로 한 쪽 다리를 잃은 박사과정생 박민재와, 진로를 잃고 방황하다 새로운 길에 들어선 석사과정생 임유진의 달콤하고 아련한 로맨스다. 추영우와 김소현이 주연이며, 촬영과 편집은 모두 마친 상태다.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15일 오전 9시 30분, 장지는 서울시립승화원이다.
영문기사 보기 (View English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