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방 의회의 국외연수 비용 부풀리기 의혹을 수사한 경찰이 현직 의원은 단 한 명도 입건하지 않고 공무원과 여행사 직원만을 송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실시한 실태 조사에선 전북도의회를 비롯한 다수 지방의원들이 수사 대상에 이름을 올린 것으로 파악됐다.
권익위의 지적에도 현직 의원 입건까지 나아가지 못한 경찰 수사를 두고 '기계적인 법 적용'이란 지적과 함께, 매년 폐해로 지적되는 지방의회 국외연수 제도 자체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권익위는 "의원들 문제 있다" 판단…경찰 수사에선 의원 입건 '0명'
국민권익위원회 로고. 국민권익위원회 제공
8일 CBS노컷뉴스 취재에 따르면 국민권익위원회는 '24년 지방의회 공무국외출장 실태점검 결과'를 통해 지난 2022년부터 2024년까지 떠난 국외연수 과정에서 항공료를 부풀려 청구하거나 규정된 금액 이상의 체제비 등을 지급한 전·현직 광역·기초의원들의 명단을 공개했다.
해당 문서에는 전북특별자치도의회와 전주시의회를 비롯한 익산·군산·김제·정읍·남원시의회 의원들과 부안·순창·진안·장수·정읍·임실·고창군의회 전·현직 지방의원들의 이름이 담겨 있다.
권익위는 이들이 공문서를 허위로 작성해 실제 항공료보다 많은 금액을 예산으로 지출해 현금화하는 등의 비위 정황을 두고 경찰 수사를 통해 사실 관계를 확인해달라고 의뢰했다.
수사 의뢰에 따라 전북도의회 등 지방의회 11곳을 수사한 전북경찰청은 현직 도의원과 시의원 등은 포함하지 않고, 지방의회 직원과 여행사 관계자만을 업무상 배임과 사기 등 혐의로 입건해 수사한 후 지난 6월 검찰에 넘겼다.
국민권익위의 조사 결과와는 완전히 배치되는 수사 결과에 경찰 측은 "의원들도 조사했으나 공모 관계나 혐의를 증명하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항공권을 위·변조해 허위로 실비를 청구하는 행위는 오래전부터 이어왔던 '관행'이고, 공무원들은 관행에 따라 비위 행위를 했을 뿐 의원들이 관여하거나 공모한 정황을 포착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시민사회 "기계적 법 적용에 실무자만 처벌…꼬리자르기 전형"
전북경찰청 전경. 심동훈 기자경찰 수사 결과는 두고 시민사회단체는 '기계적 법 적용'이라고 지적한다. 실질적으로 수혜를 입은 지방 의원들이 서류를 위·변조하는 행위를 묵인하거나 방조했을 가능성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실무자인 일선 공무원에게만 책임을 떠넘겼다는 말이다.
세금도둑잡아라 김형수 사무국장은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항공권 허위 청구 등으로 자기부담금이 줄어드는 등 실질적인 수혜를 입는 의원들은 예산 사용 과정의 위법성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다"며 "경찰은 직접 행위를 한 것 외에도 방조나 묵인하는 등 의원들의 실질적 책임 여부까지 파악했어야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초선 1~2년 차가 아닌 이상 이러한 관행을 몰랐다면 감시 기구로서 의원의 자질이 없는 것이고, 알았다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경찰이 서류 조작이라는 실무적 행위에만 매몰돼 정범이나 공범으로서의 책임이 있는 의원들에게 면죄부를 준 격"이라고 비판했다.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 또한 "예산을 사적으로 유용하고 부풀린 의혹의 핵심이자 몸통인 지방의원들은 무사히 빠져나가고 실무를 담당한 행정 직원 등 꼬리만 잘라내는 데 급급한 전형적인 부실수사다"며 "사건의 최고 책임자이자 실제 이익을 누린 의원들에겐 면죄부를 주고, 실무자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행태는 사법 기관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처사다"며 전면적인 재수사를 요청하기도 했다.
극에 달한 의회 공무원 불만…제도 개선 통해 구조적 폐단 걷어내야
출근하는 공무원들. 기사와 직접적인 관계 없음. 연합뉴스
이렇듯 직접적으로 업무에 관여한 공무원들만 수사를 받는 '꼬리 자르기' 방식으로 지방의회 일선 공무원들의 불만과 고충은 극에 달하고 있다.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실이 발표한 '지방의회 공무국외출장 실태 및 인식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방의회 공무원 상당수가 의원의 위법·부당한 요구나 외유성 출장 수발에 대해 심각한 스트레스와 무력감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선출직 의원과 공무원 간의 위계 구조 속에서 불법적인 예산 처리 지시나 관행을 거부하기 힘든 조직적 한계가 드러나, 결국 실무 공무원들만 범법자로 내몰리는 구조적 폐단이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반복되는 국외연수 비리를 근절하고 일선 공무원들을 위법한 지시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선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김 사무국장은 "위법 행위 발생 시 개별 의원이나 의회가 연대 책임을 지고 연수 비용을 반환하게끔 하는 법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북대학교 민경선 행정학과 교수는 "외유성 출장을 전제로 부풀리기 비리가 발생하는 만큼 명분 없는 해외 출장 자체를 최소화하고 지방 의원을 대상으로 국외연수비용 집행 매뉴얼을 마련해 교육해야 한다"며 "이런 노력과 더불어 국외연수를 떠나는 국가의 체류 비용에 걸맞게끔 연수비용 자체를 현실화하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영문기사 보기 (View English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