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초, 서울 양천구 CBS노컷뉴스에서 싱어송라이터 해파를 만났다. 해파 제공일단은 웃기고 싶었습니다. "네가 건강한 사회의 일원이라니? 풉." 누군가 그 말을 듣고 잠깐 실소를 터뜨리기를 바랐습니다. 모두가 승인하는 삶의 궤적을 따라야 한다는 기대 속에서 '못 해, 답답하고 억울해'와 '안 해, 멋이 없으니까' 사이를 오가며 살았습니다. 솔직하게 말하거나 화를 내기보다 웃어버리는 쪽을 택했고, 그렇게 화와 눈물을 눌러 담은 채 여유 있는 척하는 일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조차 자주 헷갈립니다. 이 앨범은 그 혼란 속에서 쌓인 비릿하고 씁쓸한 마음과 제가 좋아하는 농담이 뒤섞여 나온 결과입니다. 이 노래들이 저만 이해하는 농담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기대해 봅니다. 누군가는 웃을 것이고 누군가는 조금 불편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둘 다 괜찮습니다.
지난 4월 14일 발매된 싱어송라이터 해파의 정규 2집 '건강한 사회의 일원' 소개 글이다. CBS노컷뉴스는 이달 초 서울 양천구 CBS노컷뉴스 사옥에서 해파를 만나 앨범 제작기를 들었다. 프로듀서 조월과 함께한 후기부터 크라우드 펀딩 이야기는 물론, '웃기고 싶었다'라는 바람을 이뤘는지 물었다.
앞선 1편에서 '건강한 사회의 일원' 합창단을 급히 구할 때 '음악가'로서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감각했다고 고백한 해파. 싱어송라이터로 세 장의 정규앨범을 발매한 조월이 이번 앨범의 프로듀서로 참여한 것 역시 '받아들여지는 기분'을 느낀 순간이었다. 그는 "조월임이 계셨기 때문에 앨범이 나왔고 제가 혼자 했다면 아직도 안 나왔을 거고 '아, 나는 왜 실행을 못 할까' 하면서 자괴감이 들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얼추 밴드 사운드까지 구상한 데모(임시 녹음 곡)도 있었지만 간단한 피아노 혹은 기타 반주에 멜로디를 얹은 상태의 단출한 데모는 "편곡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조월이 편곡을 도왔다. '여기에서 한 파트만 더 있는 건 어떨까요?' 하고 제안해 조금 더 매만진 노래도 있다.
'건강한 사회의 일원' 앨범 표지와 콘셉트 사진에서 입은 옷은 구제 시장에서 산 것과 소장품을 섞었다. 해파 트위터몇몇 노래 제목도 바꿨다. 더블 타이틀곡인 '아주 즐거운 나의 집'이 그 예다. 원제는 '홈 스위트 홈'이었는데 너무 많이 쓰이는 문구라는 게 문제였다. '즐거운 집'으로 할까 하다가 "조금 비틀어서" 지금의 제목이 나왔다. '코미디 탐험대'와 '크고 거슬리는'의 원제는 각각 '농담'과 '소리'였다. 해파는 "월님이 (제목을) 지어주는 건 아닌데 '다시 생각해 보세요' 이런 식으로 말씀하셔서 고치게 됐다"라고 덧붙였다.
브라스를 리얼 악기로 쓰자는 것도 조월의 제안이었다. '자백'은 가상 악기로 브라스 소리를 넣은 상태였다. 조월 덕에 브라스 연주자와 연결됐고, 편곡도 이들에게 맡길 수 있었다는 게 해파의 설명이다. 그는 "'자백'에서는 좀 규모가 큰 화려한 재즈 밴드 느낌이 잘 산 것 같다. '아주 즐거운 나의 집'에서는 뭔가 고취하는 역할이다. '으-으-으' 하면서 클라이맥스로 갈 때 마지막에 빵 터지는 것도 조금 더 난장판같이 터지는 기분?"이라고 전했다.
'씨앗'에는 콘트라베이스 솔로가 들어갔다. 해파는 "정수민이라는 연주자랑 같이했는데 처음부터 이렇게 긴 간주에 베이스 솔로가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솔로를 기가 막히게 아름답게 해 주셨고, 지금도 참 좋아하는 부분"이라고 돌아봤다.
혼자였다면 아직 앨범이 나오지도 못했을 거라고 너스레를 떤 조월의 '존재 자체'가 큰 역할이 됐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 사람한테 폐를 끼치면 안 되겠다'란 생각이 우선이었다. 혼자 할 때는 없었던 '상담할 사람'이 생긴 것도 컸다. 심리적으로 "너무 든든한"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조월은 제3자이기 때문에 해파의 노래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피드백"이 가능했다.
"'저희는 빈말로 좋은 말 하지 맙시다. 우리 좋은 거 만드는데 솔직히 얘기하기로 해요' 했어요. 여기는 이게 필요할 거 같다 등 피드백을 주시는 게 너무 좋았어요. 합주할 때도 저만 있었다면 '좋은 것 같습니다' 하고 넘어갔겠지만, '이 부분은 깔고 이 부분은 살려주세요'처럼 바로바로 되게 적확한 피드백을 해 주는 모습을 보고 존경스러웠어요. 저에게는 너무 은인이세요."
해파가 공연하는 모습. 해파 제공
그동안 나온 해파의 정규앨범을 보면 헤어, 메이크업, 스타일링이 제법 '범상치 않다'는 특징이 있다. 개성을 표현하는 데 어떤 점을 공들였는지 궁금했다. 정작 해파는 "얼레벌레 했다"라고 답했다. 이어 "돈 주고 화장하는 게 '죽은 척하기' 앨범이 처음이어서, 이왕 이렇게 할 거면 패션쇼에 나올 것 같은 화려한 걸 하려고 했다. '나 이거 전문가한테 받았어' 할 만한 티 나는 메이크업을 받았다. 그전에는 포크 듀오를 하고 있었는데 솔로니까 '저 그렇게 잔잔한 포크 가수 아닙니다' 하는 생각도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이번 '건강한 사회의 일원' 때는 비주얼적인 상상이 잘 안돼서 비주얼 디렉터의 도움을 받았다. 비주얼 디렉터가 제시한 콘셉트는 '넥타이며 재킷이며 셔츠를 다 갖춰 입었는데 뭔가 과하고 이상한' 것이었다. 해파도 그게 마음에 들었고 동묘(서울 중구)에 쇼핑하러 갔다. 처음엔 생각보다 멋있었다고. 해파는 "이 사람 어떻게 망가지나 보자 하는 것처럼 일부러 이상하게 만드는 코디였다. 갖춰 입되 과하고 이상한"이라며 "구제 쇼핑과 개인 소장품의 결과"라고 소개했다. 컬이 들어간 머리는 안타깝게도 펌이 아니라 고데기였다고.
정규앨범 두 장 모두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텀블벅에서 펀딩을 진행했다. 이번에는 165명이 609만 2천 원을 후원해 달성률 152%를 기록했다. 해파는 포대기 대파 키링을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표지에도 나타난 대파를 활용해, 수제 대파 키링을 만드는 건 어떤지 비주얼 디렉터가 제안했다. 그래서 니들펠트로 도전했다. '만 번은 찔러야 하는데 괜찮겠나'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제가 고집 부려가지고 '할게요!' 해서 하게 됐다"고 해파는 전했다. 원데이 클래스도 다녀왔다.
시행착오도 겪었다. 오프라인에서 액세서리 부자재를 살 곳이 동대문 시장뿐이었다. 해파는 "한 개 만드는 데 한 3시간 걸린다고 봐야 한다"라며 "제가 하겠다고 했는데 손가락 관절이 막 아프더라. 힘들었지만 그래도 해 냈다!"라고 돌아봤다.
인기 굿즈인 수건을 만들 때도 사연이 있었다. 한 사이트에서 우연히 '수상한 수건 모음'을 보고, "그런 수건으로 만들고 싶"어서 샅샅이 수소문했지만 온라인에서는 스트라이프나 무지 수건밖에 안 팔아서 몇십 페이지를 뒤지고도 허탕을 쳤다. 해파는 "결국 방산시장 수건집을 하나하나 뒤졌다. 어느 집을 딱 들어갔는데 어? 무지가 아닌 게 있어서 그 수건으로 하게 돼 너무 다행이었다. 정말 열심히 찾았다"라고 말했다.
해파가 직접 만든 포대기 대파 키링. 해파 트위터
펀딩 참여자에게 하는 보상 중 가장 눈에 띈 건 '출장 공연'이다. 해파는 "펀딩을 앨범값 정도로만 다 채우기는 어려워서 고액의 상품이 필요했다, 현실적으로. 정말로 집에 가서 어쿠스틱하게 친구 두세 명 앞에서 하는 그런 상상으로 만든 건데 한 분이 신청하셔서 (충남) 당진에 갔다 왔다. 뭔가 공연장이나 매체에서만 저를 섭외하시는데 개인도 저를 섭외할 수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라고 밝혔다.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온 '건강한 사회의 일원'은 평단의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다른 이의 반응을 "엄청 잘 수용하는 편"이라는 해파는 "뿌듯했다. '이달의 음악' 이런 식으로 선정해 주신 것도 감사했다. 진짜 재밌었던 건 '흉내내기'란 노래를 SNS상에서도 꾸며야만 하는 단상을 보여줬다고 한 해석이다. 그게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가장 감사한 반응은 "건강한 사회의 일원 개뿜고 웃었다"라는 트윗이다.
발매 나흘 전 리스닝 세션으로 신보를 미리 듣는 자리는 해파에게도 특별했다. 그는 "제 노래를 듣는 사람을 제가 보는 게 처음이었다. 너무 신기했다. 되게 열심히 들으려고 해 주셔서 감사했다. 앨범에 관한 이야기를 가장 오래 한 행사이기도 한데, 눈을 감고 감상하는 그 얼굴을 보는 게 참 새로웠다"라고 말했다.
앞으로도 공연은 계속된다. 지난 5일 피아노 연주자 송하균과 서울 재미공작소에서 2인조 공연을 열었고, 오늘(13일)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영희 페스티벌'의 오후 2시 20분 공연을 맡았다. 내일(14일)은 DMZ 피스트레인 음악 페스티벌에서 '스페셜 모닝 스테이지'에 선다. 7월 22일에는 연남동에서 2인조 공연을, 8월 2일에는 남가좌동에서 공연한다고 알렸다.
앨범 소개 글 첫머리에 "일단을 웃기고 싶었습니다"라고 쓴 해파. 앨범이 나온 지 약 두 달이 됐는데 그 목표는 이뤘다고 보는지 궁금했다. "모르겠어요. 웃겼는진 모르겠고 '얘기 웃기려고 했구나' 하는 건 있죠. '푸하하!' 이렇게 웃겼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 웃기고 싶었구나. 조금 가볍게 농담을 던지려고 하는구나' 하는 의도는 알아주시는 거 같아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