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민 기자| ▶ 글 싣는 순서 |
①김성아 연구원 "고립청년 54만 명, 현실판 '오징어 게임' 중" ②김수영 교수 "자기경영에 빠진 청년들, '풍요로운 고립'에 갇혔다" ③오찬호 사회학자 "요람에서 무덤까지 경쟁에 내몰린 청년들" (계속) |
'무한 경쟁'은 끝없는 경쟁이자 목적을 잃은 경쟁이다. 무엇을 성취해도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고, 잠시 앞서 나가더라도 언제든 뒤처질 수 있다는 공포가 따라붙는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은 치열한 대학 입시와 취업 준비 과정을 거쳐 회사에 들어가면 고강도 노동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도 끝이 없는 레이스를 쉴 틈 없이 질주한다.
종착점 없는 경쟁에 뛰어들 자격마저도 '적절한 선택'을 해온 '승자'에게만 돌아간다. '패자'에게는 "할 거 없으면, 쿠팡에라도 가서 일하던가"라는 조롱이 뒤따를 뿐이다. 그렇게 생존의 굴레에서 이탈해 스스로 방문을 걸어 잠근 고립·은둔 청년은 이제 50만 명에 육박한다.
그러나 이들이 모든 걸 포기한 것은 아니다. 고립·은둔 청년 10명 중 8명 이상은 현재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며, 첫 전국 단위 실태조사에서는 응답자의 67.2%가 실제로 탈고립·탈은둔을 시도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처럼 '승자'도 '패자'도 자유롭지 못한 사회는 왜, 그리고 어떻게 유지되고 있을까. 오찬호 사회학자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진격의 대학교> 등을 통해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모습을 분석해 왔으며, <민낯들>, <납작한 말들> 등을 펴내며 우리 사회의 차별과 불평등을 꾸준히 비판해 왔다.
그는 고립·은둔 청년들이 '꿈틀'거리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완전 고립 사회'로 미끄러지느냐, 고립·은둔 청년이 다시 사회로 나오느냐의 중요한 분기점이라 지적한다.
'고독 死각지대, 고립청년' 기획기사의 후속으로 진행한 전문가 인터뷰. 세 번째 순서로 오찬호 사회학자에게 무한 경쟁 사회가 청년들을 어떻게 고립으로 내몰고 있는지, 그리고 그 구조를 바꾸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물었다.
Q. 능력주의를 강요하는 사회와 그 시선에서 청년들이 자신의 '실패'를 사회 구조의 문제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비난으로까지 내몰게 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A. 청년들의 꿈! 노력! 이상! 포부! 등등에 대한 찬양은 언제나 '과잉'되어 있다. 물론, 한 10여 년 사이에 '열정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 등장한 측면은 나름 의미 있지만 지금도 온갖 광고에는 10대의 '나다움'이 천편일률적으로 소개된다. 아직 젊으니 괜찮은 것이고, 젊으니까 당당해야 하는 것이고 등등. 과거에는 야근 따위는 두렵지 않는 걸 청춘이라고 소개했는데, 최근에는 '쫄 필요 없어. 나답게 사는 거야'는 식의 재기 발랄함을 유독 강조한다. 그러니, '실패의 상처를 드러내고 위축되는 건' 또 하나의 결핍을 인정하는 셈이다. '쿨'하지 못한 인간으로 취급받는 거다. 그런 상황이 몇 번 반복되면, 자기 비난은 금방이다.
Q.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취업이 되지 않거나, 사회적 소통이 줄어드는 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청년 고립'으로 드러난다고 보시나요?
A. 살기 힘들다고 다 한국처럼 자살률 높지는 않은 것과 비슷한 모습일 거다. 청년 고립은 한국사회를 설명해왔던 단어인 집단주의, 공동체주의의 문제점이 '이제야' 드러나는 것으로 보인다. 공동체주의는 얼핏 공동체가 소외받은 개인을 보살펴주는 느낌이지만, 실제로는 공동체로부터 사람을 자연스레 배제하는 형태로 굴러간다.
즉 공동체주의가 강한 곳에선 "다른 사람에게 민폐다"라는 말도 더 많다. 그래서 일반적인 규범이 더 규격화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식의 논리도 많다. 다양성으로 '소수'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원천 봉쇄되어 있다는 거다. 중년들은 산전수전을 겪으며 왜 스스로를 존중해야 하는지를 어렴풋이라도 이해하지만 청년들은 삶을 득도의 자세로 마주할 정도로 경험이 많지 않으니까.
자료사진Q. 대학이 더 이상 '배움의 공간'이 아니라 '취업을 위한 관문'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A.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사회 전체가 '효율성의 신화'에 너무 과하게 사로잡혀 있는 게 제일 큰 문제일 거다. 30여 년 사이 대학에는 기업의 입김이 빠르게 스며들었다. 처음엔 학점 관리 정도를 중요하게 여기더니 어느 순간 토익점수, 어학연수 경험, 각종 자격증, 공모전 수상이력, 봉사활동 나아가 생애 전체가 어떠했는지를 자기소개서를 통해서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평가가 기본값이 되면, 무슨 전공이냐도 당연히 중요해진다.
예를 들어 경영학과 학생과 사회학과 학생이 위에서 언급된 조건들을 균등하게 가졌을 때 누가 유리할까? 100% 경영학과다. 이때, 기업이 경영학이 좋아서 이런 선택을 하는 게 아니다. 사회학, 그러니까 사회 비판 어쩌고 하는 학문이 싫어서 그런 선택을 하는 거다. 인문학이 인기가 없는 건 이런 거다. 그러니, 대학은 이런 풍토의 학문이 학교에 존재할수록 취업률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 구조조정을 한다. (그런다고 취업을 더 시켜주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한다.)
그런데 핵심적인 질문이 빠졌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직업이 있다. 누구는 언론인이 되고 싶고, 법조인이 되고 싶고, 교사가 되고 싶고, 창작자가 되고 싶고, 사회활동가가 되고 싶고 등등. 그런데 이들도 이제 대학에서 비슷한 걸 배우고 사회에 나온다. 그런 사람이 PD가 되고 검사가 되고 교사가 된다. 사회의 악순환은 그렇게 시작된다.
Q. 이 시대 청년들은 명문대를 위한 수험 생활, 대기업을 위한 취업 준비, 고시생 등 '성공'을 위해 은둔·고립이 어느 정도 정당화되는 분위기가 형성된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청년들에게 가져오는 부작용은 어떤 게 있나요?
A. 적당하면 무슨 문제겠는가. 너무 길고 가혹하니 문제다. 이 '길고 가혹하다'는 표현에 부작용의 성질이 다 들어가 있다. 모든 경쟁은, 목표를 정해놓고 '목표와 무관한 것을 하지 않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고3 때 '주변 다 끊고' 공부하던 시대는 옛날이야기다. 대학교 4학년 때 '정신 차리고 취업 준비하던' 시대는 고전이다. 취업하면 뭐 자유로운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경쟁을 한다. 그러면 그만큼 '많은 것을 차단'해야 한다. 내가 경쟁에 몰입할수록, 시야는 좁아진다는 거다. 자신의 정신건강? 이해할 정보가 없다. 실패를 사회구조적으로 분석하는 거? 해 본 적이 없다. 그렇게 무너지는 거다.
Q. 심각한 고립·은둔 상태가 아니더라도, 한국 사회의 사회적 연결망이 전반적으로 느슨하고 부족하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동창회를 가도 '명문대에 간', '대기업에 취업한', '부동산 부자가 된' 이들만 나오는 세상이다. 그리고 그들끼리 또 다른 네트워크를 만들어 서로에게 도움을 주면서 살아간다. 요즈음엔 이런 추세가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예를 들어, 독서토론 같은 모임조차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가장 무탈한 대화만을 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쉽게 말해, 한국사회는 '서로 연결되는데'에도 많은 자격이 필요한 거다. 그러니 '고립, 은둔' 전단계의 사람이 이때 어떤 연결될 기회를 놓치게 된다. 기존의 연결망에 연결되기엔 자신이 '적합하지 않다는' 신호를 계속 확인한다. 다음 단계는? 고립이고 은둔이다. 그럼 '사회적 연결망이 전반적으로 느슨한' 원인은 무엇일까? 아쉽지만, 한국사회는 '사회적 연결망' 자체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하라고 해도 다들 제대로 못할 거다. "인간관계 다 필요 없다. 결국엔 혼자다" 이런 조언이 왜 부유하겠는가.
Q. 청년 고립을 '노력 부족·개인의 선택'으로 환원하는 것은 왜 위험한가요?
A. 고립은 외형적으로는 개인의 선택한 형태지만, 어떤 인간도 고립을 선택하려고 하지 않는다. 고립은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거, 내향적인 성격 이런 것과 무관하다. 사회와의 연결이 차단되는 거다. 즉, 청년 고립은 그 자체가 (개인의 노력이 어떠하든) 사회적 문제이고 원인과 해법을 찾는 것도 사회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뭐, 개인의 문제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것만 집중하면, 결국 사회적으로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면 "운동만 해도 우울하지 않아요!" 따위의 처방만을 말하게 되는 거다.
Q. 청년 개인에게 요구되는 변화와 사회가 청년에게 제공해야 하는 변화는 어떻게 구분될 수 있을까요?
A. '청년의 서사'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청년이 청년답게 도전하고 성취하고 실패하면 또 일어나고 했던 시절이 있었고 지금은 '그 부작용'이 너무 크다. 청년 고립은 대표적인 부작용 중 하나일 거다. 청년의 서사가 너무 거창했기에 나타난 결과다. 거창했기에, '스스로를 부족하게' 느끼는 경우도 많다. 이런 거대 청년 서사에게 벗어난다면, '상처'도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회는 지금껏 이런 청년 서사를 이용해, 직무유기나 다름없는 접근을 했다. 최근에 지원의 범위가 커졌지만 큰 줄기는 여전하다. "파이팅 할 기회를 주겠다!"는 식의 분위기는 그대로다. 사회도 단순해져야 한다. 현상을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내 집 마련이 힘들다고 청년들이 힘들어하면, '내 집 마련이 어려운 현상'을 직시하고 개선해야 한다. 잠재력을 키워서 역량을 발휘해 부자가 되라는 식의 조언을 더 이상 해서는 안 된다.
Q. 지금의 청년이 '희망'을 갖기 위해 한국 사회가 가장 먼저 바꿔야 할 구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사회 전체의 양극화가 너무 심하다. 객관적인 해결이 필요하다. 그런데 가능하겠는가? 소득격차 심한 건 다들 인정하면서, 막상 그걸 줄이자고 하면 반대 여론이 정말 심하다. 지역격차를 줄이는 것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런저런 해법 만들면 다들 빈정거린다. 비정규직 없애자고 하면 "열심히 공부해서 정규직 된 이들에게 역차별이다"라고 하고 지방대 학생들에게 기회를 주자고 하면 "지방 사는 게 벼슬이냐"고 한다.
즉, 한국사회는 양극화를 '해소할' 정서가 완전히 사라졌다. 경쟁이 과도하니, 역설적으로 경쟁을 줄일 수가 없다. "내가 고생한 게 억울하다!"는 말만 넘쳐난다. 그럼 이 정서를 바꾸는 건 어떻게 가능한가? 지금처럼, 경쟁에서 '진' 이들에게 무슨 도움을 준다는 식으로는 한계가 많다. 그건 '노력도 안 한 사람에게 혜택을 준다'는 식으로 이해될 뿐이다.
그래서 이런 식의 경쟁에 뛰어들지 않아도 되는 사람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잘 먹고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게 아니다. 직업의 다양성이 알려져야 하고, 그 직업에 이르는 길 역시 '다양하다'는 게 드러나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각기 다른 경쟁을 하며 사회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나와 네가 경쟁하는 길이 다름을 알면, 타인을 평가하는 건 얼마나 무의미한지도 알 수 있다. 평가가 줄어들면, '정상-비정상'이란 문법도 사라진다. 상처받는 사람이 주는 것이고, 이는 사회에서 '이탈할' 사람도 줄어듦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