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급발진 의심 사고 당시 현장. 강릉소방서 제공 2022년 강원 강릉에서 발생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의 책임 소재를 둘러싼 민사소송이 장기화되고 있는 가운데 재판부가 '자동차의 두뇌'로 불리는 전자제어장치(ECU) 사양서의 목차를 우선 제출하도록 했다.
이는 제조사의 영업비밀 보호 필요성과 사고 원인 규명을 위한 증거 확보 필요성을 함께 고려한 조치로 향후 재판부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지 관심이 모아진다.
서울고법 춘천재판부 민사2부(심영진 부장판사)는 13일 이도현(사망 당시 12세)군 가족이 KG모빌리티(KGM·옛 쌍용자동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 변론준비기일을 열고 ECU 사양서에 대한 문서제출명령의 필요성과 범위를 논의했다.
재판부는 이날 피고 측에 ECU 사양서의 목차를 재판부에 별도로 제시하도록 하고, 이를 검토한 뒤 사건 쟁점과 관련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부분의 제출 여부를 다시 논의하는 방향으로 절차를 진행하기로 했다.
전체 2~3만 페이지에 이르는 ECU 사양서 공개에 대해 제조사의 영업비밀을 보호하면서도 사고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필요한 자료는 재판 과정에서 검증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절충적 조치로 풀이된다.
이번 공방은 KGM이 지난 4월 항소심 과정에서 ECU 사양서 일부를 제출하면서 시작됐다.
KGM은 당시 "브레이크페달은 단순한 전기적 스위치로 ON·OFF 상태만 ECU에 전달하며, 이 신호에 대해 ECU 내부에서 복잡한 알고리즘이나 로직에 따른 별도 처리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취지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2페이지 분량의 ECU 사양서를 제출했다.
이에 도현군 가족 측은 제조사가 ECU 사양서 일부를 직접 증거로 제출한 만큼 차량의 제어 구조와 오류 감시·처리 방식 등을 검증할 수 있는 관련 부분도 확인해야 한다며 ECU 사양서 전체에 대한 문서제출명령을 신청했다.
ECU가 가속페달과 브레이크페달뿐 아니라 변속기 제어장치(TCU), 잠김방지제동장치(ABS), 차체자세제어장치(ESP) 등에서 전달되는 데이터를 종합해 엔진 토크를 결정한다며 사양서가 필요하다는 취지다.
고 이도현 군의 아버지 이상훈씨가 13일 오후 항소심 재판이 끝난 뒤 취재진 앞에서 발언하는 모습. 구본호 기자반면 KGM 측은 ECU 사양서에 차량 제어 구조가 담겨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고 당시 실제 소프트웨어 오작동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ECU가 다단계 감시 구조로 설계됐다는 점이 확인되더라도 사고 당시 최초 오작동이 발생했고, 이를 감시하는 기능까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이 별도로 입증돼야 한다는 것이다.
또 사양서가 방대한 핵심 기술자료이자 영업비밀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일부 자료가 제출된 뒤 추가적인 문서제출 요구가 계속 이어질 경우 소송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했다.
재판부는 이날 사고 당시 차량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추가 감정 절차도 이어가기로 했다.
원고 측은 차량의 변속기 상태가 변하는 과정에서 가속페달을 밟았을 때 RPM과 차량 움직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며 사고 현장 또는 유사한 조건에서의 실험을 요구했다.
KGM 측은 실제 사고 현장에서 실험할 필요성에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동차 주행시험장 등 통제된 장소에서 차량 변화량을 측정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재판부는 감정인을 지정한 뒤 양측 의견을 들어 구체적인 감정 장소와 방법을 정하기로 했다.
원고 측 하종선 변호사는 재판 직후 "ECU 사양서에 해당 부분이 제출되면 오류 발생을 탐지하고 대응한 뒤 토크를 차단해 비정상적인 가속을 제어하는 설계가 실제로 돼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며 "그것만으로 이 사건 급발진의 직접적인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급발진 소송에서 이 정도로 근접한 기술적 자료가 나온 사례는 없었다"고 말했다.
재판부의 결정에 대해서는 "자동차 제조사의 영업비밀을 최대한 보호하면서도 실체적 진실 발견과 공정한 재판을 위해 어떤 자료를 재판 영역으로 끌어낼지 고민한 판단"이라고 평가했다.
급발진 의심사고의 정확한 원인 규명을 요청하는 1만 7500부 가량의 탄원서. 전영래 기자 도현군 아버지 이상훈씨는 재판이 끝난 뒤 "지금까지는 운전자의 페달 오조작 여부를 검증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ECU 소프트웨어와 전자제어장치에 실제 오류 가능성이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전환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주장만 입증하자는 것이 아니라 제조사가 주장하는 내용도 함께 공개된 자료를 토대로 검증해 실체적 진실을 가려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현군은 2022년 12월 강릉에서 할머니가 운전하던 차량에 타고 있다가 차량이 도로 구조물을 들이받는 사고로 숨졌다.
도현군 가족은 차량 결함에 따른 급발진이 사고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제조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 재판부는 제조사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음 기일은 오는 9월 4일 춘천지법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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