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인공지능(AI) 시대, 회사와 정식 근로계약을 맺지 않고 일하는 새로운 직업이 생기면 법적 '근로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근로자 지위가 인정되면 임금과 연차휴가, 퇴직금 등이 보장되고 노동조합도 설립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에 '근로자성'은 오래된 법적 쟁점이다.
법원은 골프장 캐디와 학습지 교사에 이어 최근 배달 라이더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형태의 일자리가 등장하면 근로자의 범위를 따져보고, 점차 확대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위탁계약 맺었어도…법원 "배달 라이더는 근로자"
14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제38-1민사부(이지영·황성미·박성윤 고법판사)는 지난달 배달대행업체와 업무위탁계약을 맺고 일한 배달 라이더 A씨를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라고 인정했다.
A씨는 회사와 근로계약이 아닌 '배송대행 업무위탁 계약'을 맺고 배달 업무를 했다. 일반적인 회사원과 달리 업무를 시작하고 마치는 시점이나 배달 주문을 받을지 여부 등을 정하는 데에도 일정한 재량이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개인사업자'에 가까웠다.
하지만 재판부는 계약의 이름보다 실제로 A씨가 어떤 방식으로 일했는지 살폈다. 회사는 GPS 등을 통해 라이더의 위치와 배달 현황을 확인했고, 관리자들은 단체대화방 등을 통해 업무와 관련한 지시를 전달했다.
재판부는 이런 사정을 종합해 A씨가 회사의 상당한 지휘와 감독을 받았다고 판단했다. 업무시간 등을 정하는 데 일부 재량이 있고 근로계약 대신 위탁계약을 맺었다는 이유만으로 근로자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취지다.
새로운 직업 골프장 캐디, 1993년 노조법상 근로자 인정
스마트이미지 제공누구를 '근로자'로 볼 것인지를 둘러싼 법원의 고민은 30여년 전부터 이어졌다. 정식 근로계약을 맺지 않고 일하는 골프장 캐디나 학습지 교사처럼 새로운 직업이 등장하면서다.
1993년 대법원은 유성컨트리클럽 캐디 사건에서 골프장 캐디를 노동조합법상 근로자로 인정했다. 캐디들이 골프장과 정식 근로계약을 맺지는 않았지만, 회사 측의 지휘·감독을 받으며 일했다는 점을 중요하게 봤다. 계약을 어떤 형태로 맺었는지보다 실제로 회사에 종속돼 일했는지 따져야 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2005년 웅진씽크빅 학습지 교사 사건에서는 다른 결론을 내렸다.
당시 대법원은 이들이 회사와 사용종속관계에서 임금을 목적으로 일하는 근로자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들을 조합원으로 둔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도 노동조합법상 노동조합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993년 캐디는 노동조합법상 근로자로 인정됐지만, 2005년 학습지 교사는 인정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학습지 교사의 근로자성을 둘러싼 논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후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이 회사의 위탁계약 해지를 문제 삼으면서 법원은 다시 같은 문제를 판단하게 됐다.
한 차례 좌절 겪은 학습지 교사, 2018년에 '근로자'로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은 회사가 조합원들과 위탁계약을 해지하자 2011년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와 부당노동행위 구제를 신청했다. 노동위원회는 이들이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상 근로자가 아니라며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박태준 부장판사)는 2012년 11월 1일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 사건에서 이들을 노동조합법상 근로자에는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학습지 교사들이 회사에서 받는 수수료로 생활하고 회사 사업에 편입돼 일했으며, 업무 과정에서 상당한 지휘·감독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했다. 법원은 이처럼 회사에 경제적으로 의존해 일한다면 노동조합법상 근로자로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다만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은 회사와 1년 단위 위탁사업계약을 맺고 고정급 대신 회원 관리 실적 등에 따라 수수료를 받았다. 매일 회사에 출퇴근할 의무도 없었다. 법원은 이런 점을 들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쉽게 말해 계약 해지를 근로기준법상 '부당해고'라고 다툴 수는 없지만, 노조를 만들어 회사와 교섭할 권리는 있다고 본 것이다.
이 판단은 2018년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대법원은 학습지 교사들이 노동조합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특정 회사의 소득에 얼마나 의존하는지, 회사가 계약 내용을 정하는지, 지휘·감독을 얼마나 받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야 한다고 봤다.

AI시대 근로자성 혼란 불가피…법률 정비 필요
캐디와 학습지 교사를 거쳐 최근 배달 라이더까지, 새로운 형태의 일자리가 등장할 때마다 법원은 계약의 형식만으로 판단하기보다 실제 업무 방식과 회사의 지휘·감독 정도 등을 구체적으로 따져 '근로자성'을 판단하는 흐름은 이어갔다.
다만 AI와 플랫폼 산업 시대가 본격화하면 새로운 형태의 일자리가 늘면서 근로자성을 둘러싼 논쟁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법조계에선 이런 새로운 직업을 법적 근로자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률 정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가 점차 늘어날수록, 현행법 내에서 근로자성을 인정할 수 있을지 판단이 재판부마다 엇갈릴 수 있다"면서 "새로운 형태의 노동을 어떻게 보호할지 입법을 통해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영문기사 보기 (View English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