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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현관문에 붙은 종이 한 장이 사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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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10-0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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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환 경감의 사기(詐欺) 프로파일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는 지난달 29일 일부 지역에서 위·변조된 우편물 도착안내서가 발견되고 있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왼쪽은 정상 안내서, 오른쪽은 위조된 안내서의 모습. 이승환 경감 제공과학기술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는 지난달 29일 일부 지역에서 위·변조된 우편물 도착안내서가 발견되고 있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왼쪽은 정상 안내서, 오른쪽은 위조된 안내서의 모습. 이승환 경감 제공
집에 돌아왔는데 현관문에 '등기우편물 도착 안내서'가 붙어 있다면 누구라도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무슨 우편물이 왔지?', '혹시 중요한 등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안내서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해 우편물의 내용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자연스럽다. 나에게 온 우편물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확인하고 싶은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사기범들은 바로 이 평범한 마음을 범죄의 통로로 이용하고 있다.

우정사업본부는 지난 9월말 일부 지역에서 위·변조된 '우편물 도착 안내서'가 발견됐다며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실제 우편물 도착 안내서의 외형을 그대로 본뜬 뒤 집배원 연락처를 피싱용 전화번호로 바꾸거나 QR코드를 변조한 형태다. 육안으로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렵다. 이른바 '레터피싱'이다.

레터피싱은 사기범이 먼저 전화를 걸어오는 기존 보이스피싱과 다르다. 사기범은 현관문이나 우편함에 가짜 안내서를 붙여놓고 피해자가 스스로 전화를 걸도록 만든다.

몇 년 전 경북 경주에서는 우편물 도착 안내서를 위조해 아파트 현관과 우편함 등에 붙인 일당이 경찰에 검거됐다. 이들이 제작한 가짜 안내서는 무려 1538장에 달했다. 주민이 안내서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면 사기범은 우체국 직원이나 검찰 관계자를 사칭했다. "우편물이 검찰청으로 넘어갔다", "사건에 연루됐다"는 식으로 불안감을 키운 뒤 신분증이나 돈을 요구했다. 시민들의 신고로 실제 금전 피해는 막을 수 있었지만, 이 사건은 레터피싱의 전형적 방법을 잘 보여준다.

사기범은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현관문에 스티커 한 장을 붙였을 뿐이다. 그리고 피해자가 직접 전화를 걸어오는 순간부터 사기극이 시작됐다. 최근 발견된 위조 우편 안내서 역시 이런 방식이다. 정상적인 안내서는 특수 감열지로 제작되고 포스트잇처럼 쉽게 탈부착할 수 있는 점착제를 사용하지만, 가짜는 일반 용지에 투명테이프로 붙이거나 일반 스티커처럼 부착한 흔적이 나타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차이를 모르면 가짜라는 사실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심리

레터피싱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피해자가 스스로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자신이 직접 확인하고 행동했다고 생각하면 그 행동의 결과를 상대적으로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온 것이 아니다. 내 집 현관문에 안내서가 붙어 있었고, 내가 직접 번호를 확인했고, 내가 직접 전화를 걸었다. 그래서 상대방의 말을 더욱 믿게 된다.

"제가 직접 전화했으니까 우체국이 맞겠지" 이렇게 한 번 신뢰가 형성되면 사기범의 다음 말은 훨씬 쉽게 받아들여진다. "검찰청 우편물이 반송됐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우편물 문제였지만 어느 순간 형사사건으로 바뀐다. 피해자는 돈을 빼앗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바로 이 순간부터 판단의 중심이 사실 확인에서 문제 해결로 이동한다.

평소라면 차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막상 "검찰청에서 등기 우편물이 발송되었는데 반송되었다"는 말을 듣고 본인 확인을 요구하면 받아들이게 된다. 사기범은  피해자가 자신을 100%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심하고 확인할 시간을 빼앗는 것이다.

심리학적 분석

레터피싱에는 여러 심리적 장치가 동시에 작동한다.

첫째는 권위 효과(Authority Effect)다. 사람은 자신보다 전문성과 권한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는 대상의 말을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사기범은 우체국, 검찰, 경찰 등 공공기관의 이름과 외형을 빌려 자신의 말에 권위를 부여한다. 이번 사건에서는 그 권위가 전화보다 먼저 만들어진다. 현관문에 붙은 공식 안내서처럼 보이는 스티커가 먼저 신뢰를 만든다. 이후 전화를 받은 사람이 "우체국입니다"라고 말하면 피해자는 이미 만들어진 신뢰를 바탕으로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이게 된다.

둘째는 공포에 의한 판단의 단순화(Fear-induced cognitive narrowing)이다. "당신의 명의가 범죄에 이용됐다"는 말을 듣는 순간 사람의 관심은 진위 확인보다 문제 해결에 집중된다. 불안과 공포가 커질수록 복잡한 정보를 차분하게 검토하기보다 눈앞의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는 경향이 나타날 수 있다.

셋째는 시간 압박(Time pressur)이다. "지금 바로 확인해야 합니다" "곧 사건이 진행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이런 말을 반복하면 피해자는 생각할 시간을 잃는다. 사기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거짓말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가 의심할 시간을 없애는 것이다.

넷째는 현실감에 의한 신뢰 형성(Perceived realism and trust formation)이다. 휴대전화로 날아온 문자보다 실제 현관문에 붙어 있는 종이는 훨씬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사람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더 실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이다.

결국 레터피싱은 단순히 가짜 안내서를 만드는 범죄가 아니다. 스티커 하나로 신뢰를 만들고, 전화 한 통으로 불안을 키우며, 공포와 시간 압박으로 피해자의 판단을 흔드는 심리조작형 범죄인 것이다.

이승환 경감의 조언

사기범은 이제 굳이 피해자에게 먼저 전화할 필요가 없다. 현관문에 그럴듯한 스티커 한 장만 붙여놓으면 피해자가 먼저 전화를 걸어온다. 그래서 '내가 직접 전화를 걸었으니 괜찮겠지'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오히려 내가 먼저 전화를 걸게 된 상황이라면 한 번 더 멈춰야 한다.

우편물 도착 안내서가 붙어 있다면 안내서에 적힌 전화번호로 바로 연락하지 말고 우편고객센터 1588-1300이나 가까운 우체국에 직접 확인해야 한다. QR코드가 있다고 해서 바로 촬영하거나 접속해서도 안 된다. 우정사업본부는 인터넷이나 전화를 이용해 주민등록번호와 계좌번호 등을 수집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개인정보를 요구받는 순간에는 즉시 대화를 중단해야 한다.

사기범은 피해자가 의심하기 전에 믿게 만든다. 그래서 사기를 막는 가장 중요한 행동은 어려운 보안기술이 아니다. 잠시 멈추는 것이다. '정말 우체국에서 보낸 것이 맞을까?' '이 한 가지 질문만 해도 사기범이 만들어 놓은 시나리오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현관문에 붙은 종이 한 장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 종이를 믿는 순간 개인정보와 금융자산을 빼앗는 범죄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사기 예방의 첫걸음은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확인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것이다.

이제 피싱은 휴대전화 안에만 있지 않다. 우리 집 현관문 앞까지 찾아오고 있다.

이승환 경감(경찰청 치안정보국), '사기 프로파일링' 저자


※ 외부 필진 기고는 CBS노컷뉴스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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