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5일 오후 경기 과천 중앙선관위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 관련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노 위원장과 허철훈 사무총장은 사의를 표명했다. 과천=박종민 기자6·3 지방선거 이전 전국동시선거들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무번호 용지가 송부되고 실제로 사용된 사례들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미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전조 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났음에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이번 선거에서 투표용지 인쇄 비율 하한을 선거인 수의 50%로 줄인 것이다.
심지어 중앙선관위는 당초 지난 선거들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했던 사례들이 있었는지를 묻는 국회의 질문에 "보고된 바 없다"는 답변을 내놓았다가 뒤늦게 정정하기도 했다. 총체적 부실 관리 속에 이번 전대미문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일어났다는 진단이 나온다.
18일 CBS노컷뉴스가 더불어민주당 양부남 의원실을 통해 확보한 중앙선관위 '선거일 투표용지 추가 송부 투표소 등 현황'(2022년~2025년)에 따르면, 무번호 투표용지를 송부받은 투표소는 2022년 제8회 지방선거에서 2곳, 2024년 제2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1곳, 그리고 2025년 제21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무려 42곳으로 확인됐다. 각 투표소의 투표지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긴급하게 일종의 비상용 투표용지를 수혈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8회 지선에서는 오후 3시쯤 전남 고흥군 도양읍 제6투표소에 200매가, 오후 4시 50분쯤 경기 용인시 기흥구 동백3동 제4투표소에 100매가 송부됐다. 용인시 기흥구 동백3동 제4투표소는 22대 총선에서도 오후 2시 10분쯤 용지를 300매 추가로 받았다. 21대 대선에서는 무번호 투표용지가 42곳으로 각각 보내졌고, 송부 매수는 투표소마다 50~400매로 다양했다.
그중 투표용지가 다 떨어져 실제로 무번호 용지를 사용한 경우는 2차례로 확인됐다. 8회 지선 때 전남 고흥군 도양읍 제6투표소에서 1장, 21대 대선 때 대구 달성군 화원읍 제12투표소에서 12장이 사용됐다. 선관위에서 줄곧 홍보하는 '소중한 한 표'의 의미를 고려할 때 결코 적은 수치가 아니다. 8회 지선 본투표 용지 최소 인쇄 기준은 60%, 22대 총선·21대 대선은 70%. 그런데도 투표용지가 일부 지역에서 모자랐고, 실제로 무번호 용지가 사용된 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중앙선관위는 이번 지선을 앞두고 용지 인쇄 비율 하한을 50%로 낮췄다. 중앙선관위는 제9회 지방선거 종합관리지침에서 "선거일 투표용지 인쇄 매수는 예상 사전투표율 및 최근 선거의 투표율 등을 감안해 축소 인쇄 필요성이 인정될 경우 위원회 의결로 선거인수 50%(하한)를 기준으로 조정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관련 기사: [단독]'본투표 50%' 지침 첫 도입, 용지 대란 트리거였다) 심지어 과거 무번호 용지를 받았던 시·군·구 선관위 중 이번에 인쇄 비율을 하향 조정한 곳도 확인됐다. 21대 대선에서 무번호 투표용지를 받은 서울 강남구 도곡2동 제3·제4투표소,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제7투표소·연무동 제6투표소는 모두 이번 지선에서 투표용지를 선거인 수의 55%로 축소해 인쇄했다. 이중 도곡2동 제4투표소와 파장동 제7투표소, 연무동 제6투표소는 이번 지선에서 실제로 또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해 무번호 투표용지를 사용했다. 심지어 도곡2동 제4투표소는 유권자들이 대기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황당한 것은 중앙선관위가 과거 투표용지 부족 사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민주당 양부남 의원실이 선관위에 최근 20년간 대선과 총선, 지선 등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했던 사례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자, 선관위는 "이전 선거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했던 투표구는 확인·보고된 사실이 없었다"고 답했다. 그리고 하루 뒤 "다시 파악해 보겠다"고 입장을 바꾸고 사흘 만에 과거 용지 부족 사례를 보고했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양부남 의원실에 "왜 (지난 선거들에서) 무번호 용지 배부 여부가 초반에 보고되지 않았었는지 의문"이라고 황당한 설명도 덧붙였다고 한다.
양 의원은 국회 '투표용지 부족 사태 등 국민 참정권 침해 진상 규명 및 선거 관리 개혁을 위한 국정조사'(가칭) 특별위원회 위원이다. 그는 "60% 기준에서도 투표용지 부족 우려가 있었던 선례를 제대로 파악했다면, 선관위가 50% 하향 결정을 쉽게 내릴 수는 없었을 것"이라며 "과거 선거의 경고 신호를 놓친 채 투표용지 여유분을 줄인 것이 이번 사태를 키운 원인"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