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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억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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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기념재단 제공518기념재단 제공
1987년 5월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대학 입학 후 맞은 첫 축제는 달큰새큰한 막걸리 내음과 유쾌한 기타 소리로 가득 차있었다. 기분 좋게 취해 흥얼거리며 다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나에게 '오월 사진전' 대자보가 다가왔다. 눈은 반쯤 감은 채 잠든 듯한 어느 여성의 얼굴, 검붉게 멍들어 퉁퉁 부은 어느 청년의 얼굴, 머리 한쪽이 날아간 또 다른 남성의 얼굴, 그리고 얼굴인지조차 분간도 못할 정도로 뭉개진 그 누구의 이목구비 잔해. 가마니 거적 위에 눕혀진 이들의 충격적인 사진에 현기증이 몰려와 바닥에 주저 앉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그동안 왜 몰랐는가' '학교도 언론도 그 누구도 왜 이런 끔찍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나''국가와 군대가 자국민을 상대로 정말로 이런 잔인한 짓을 벌였다는 말인가''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맞는가' 두서없이 맴도는 질문들이 축제의 흥청거림과 5월 대기의 향긋함을 순식간에 밀어냈다. 학교를 나선 나는 다방 대신 서점을 찾았다. 5.18 관련 책 서너권을 샀다. 읽기를 멈출 수 없어 밤을 샜다. 5월이 되면 광주에서는 같은 날 제삿상이 차려지고 소리 죽인 울음이 골목골목을 채운다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아팠다. 7년이 지났지만 광주는 여전히 폭동이고 소요이고 금기였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과 보도 통제에 맞서 광주의 진상을 알리려던 사람들은 말 그대로 목숨을 바쳤다.  광주에서 그날의 참상을 목격한 서강대생 김의기는 그해 5월 30일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공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다'는 유인물과 함께 서울 기독교회관 건물 6층 아래로 떨어져 숨졌다. 82년 10월에는 전남대 총학생회장 출신 박관현이 5.18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옥중 단식하다 사망했다. 86년에는 서울대생 김세진, 이재호가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동반 분신했다.
 
참상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시도도 뒤따랐다. 학교 앞 서점에서 샀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전남대 출신들이 5.18 현장의 시민들을 인터뷰하고 정리한 내용을 황석영 작가가 감수해 85년에 발간했다. 예상했던대로 책은 금서로 지정돼 전량 압수됐다. 황 작가는 수사 기관에 연행되고 출판사 사장은 구속됐다. 하지만 금서 지정 이후에도 대학가를 중심으로 복사판이나 표지갈이판이 유통돼 5.18의 진실을 끈질기게 알려갔다.
 
87년 6월 항쟁은 5.18 진상 규명의 문을 마침내 열어젖혔다. 민주화 열기로 국회가 여소야대로 재편되자 88년 국회에 5.18진상조사특위가 구성됐다. 국회 청문회도 전국에 생중계됐다.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했던 5.18이 처음으로 공론화됐다.
 
5·18 당시 광주 금남로에 등장한 헬기. 5.18 기념재단 제공5·18 당시 광주 금남로에 등장한 헬기. 5.18 기념재단 제공
청문회를 통해 5.18의 일부 진상이 밝혀지면서 책임자 처벌 요구도 분출됐다. 하지만 당시 노태우 정권은 외면했다. 노태우와 합당해 집권한 김영삼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했지만 심판은 역사에 맡기자며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에 대한 사법적 단죄는 회피했다. 그해 검찰은 5.18 피해자들의 고소 고발 사건 수사에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등의 논리로 신군부 인사들에게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리며 면죄부를 줬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5.18 가해자들에 대한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내용의 '5.18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범국민 서명운동을 벌였다.
 
검찰의 무혐의 처분 석달 뒤인 95년 10월 국회에서 노태우의 4천억 원 비자금 의혹이 폭로되자 5.18 진상 규명도 탄력을 받았다. 비자금 조성 의혹과 함께 12.12 및 5.18에 대한 진상도 함께 규명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았기 때문이다. 압박에 몰린 김영삼 정권은 5.18 특별법을 제정하고 재수사에 착수할 수 밖에 없었다. 재수사팀의 기소에 대법원은 97년 12.12는 군사반란이자 내란이며 5.18은 내란 행위에 맞서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라고 판결한다. 17년만에 5.18이 폭동의 딱지를 사법적으로 떼어낸 순간이었다. 그해 5.18은 국가기념일로도 지정됐다.
 
2000년대 이후에는 군 수사기관 연행 뒤 의문사나 계엄군의 집단 발포, 암매장, 헬기 사격 등 5.18 관련 개별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가 각종 위원회(의문사위, 과거사위)를 중심으로 이어졌다.
 
반복되는 진상 조사에도 불구하고 5.18에 대한 폄훼와 왜곡은 끊이지 않았다. '5.18은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이라거나 '계엄군의 발포는 광주 폭도들이 무기를 탈취해 먼저 공격했기 때문에 일어난 정당 방위'라는 가짜뉴스가 번져 나갔다. 이에 2019년 여야 추천으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구성돼 종합적인 조사가 이뤄졌다. 조사위는 4년여에 걸친 조사 끝에 윤석열 정권 때인 24년 6월 '최종 종합보고서'를 냈다. 최종 보고서는 계엄군이 비무장 시민에게 먼저 발포했으며 북한군 개입설은 완전 허구라고 밝혔다.
 
이처럼 5.18은 40여 년에 걸쳐 누군가의 목숨과 구속 투옥을 각오한 기록과 민주 시민의 저항으로 진실의 조각들을 어렵게 맞춰올 수 있었다. 그 조각들을 발굴하고 맞출 때마다 무도한 권력을 방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되새겼다. 5.18의 가르침은 윤석열의 12.3 내란 계엄 상황에서 되살아났다. 5.18은 지금도 진행중인 셈이다. 겉으로는 5.18을 존중하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폄훼를 일삼는 정치세력들과 표현의 자유를 신성불가침으로 숭배하는 반민주주의자들과 가짜뉴스에 물든 일부 세대들과 '기억의 전쟁'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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