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정부가 국정 최우선 과제로 내건 '메가프로젝트'가 노정 관계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노란봉투법(개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시행령 논란과 메가특구특별법의 노동 특례 논란은 별개의 사안처럼 보이지만,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호남 반도체 메가프로젝트와 맞닿아 있다.
'속도전'을 앞세운 정부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노동계가 충돌하면서 어렵게 열리기 시작한 사회적 대화의 문마저 다시 닫힐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메가특구가 실제 가동되기까지 시간이 남은 만큼 노동 문제만큼은 속도전에서 떼어내 대화의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메가프로젝트가 불러낸 '노란봉투법 시행령'
17일 고용노동부 등에 따르면 노동부는 이재명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노동쟁의 대상 범위를 구체적으로 규율하는 방안을 이달 안에 내놓는 것을 목표로 검토에 착수했다. 시행령·시행규칙 등 행정입법도 검토 대상이다.
발단은 삼성전자 노조가 호남 반도체 투자 계획도 단체교섭 의제로 다루겠다고 주장하면서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21일에 이어 지난 11일 국무회의에서도 "노란봉투법상 쟁의 대상인지 아닌지 규정으로 명확하게 해달라는 요구가 있다"며 "시행령이나 시행규칙, 시행 지침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은 하라"고 지시했다.
정권의 명운을 건 메가프로젝트의 이행 속도가 시행 초기 단계인 노란봉투법의 해석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셈이다.
당초 법적 구속력이 없는 해석지침 보강으로 가닥을 잡았던 노동부도 방향을 틀었다. 김영훈 노동부 장관은 지난 12일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업무 지침으로 충분히 모호성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대통령께서 지침보다는 구체적인 제도화 검토를 지시하셨다"며 "시행령이나 시행규칙 등 어떤 방법이 있을지 다각도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제는 노란봉투법에 쟁의 대상을 하위 법령에 위임하는 조항이 없다는 점이다. 시행령은 법률이 위임한 범위에서 집행 기준을 구체화해야 하는데, 별도의 위임 없이 노동부가 쟁의 대상이라는 핵심 기준을 정할 경우 위법·월권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한 여당 환노위 의원도 "위임 조항이 없어 시행령으로 규정할 경우 우려되는 지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노동부는 법률의 위임이 필요한 시행령뿐 아니라 위임 없이도 가능한 세부 절차 규정 성격의 '집행명령'으로 규율하는 방안도 함께 검토하고 있다. 다만 노동부 관계자는 위임 조항을 신설하는 법 개정에 대해서는 "아직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선을 그었다.
노동계 반발의 핵심은 삼성전자 노조의 주장이 법을 제한하는 '빌미'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정 노조가 반도체 투자 계획을 교섭 의제로 삼겠다고 한 것을 계기로 수년간 진통 끝에 개정된 법 전체에 제한을 가하려 한다는 주장이다.
대통령의 시행령 검토 지시가 야당의 법 재개정론에 물꼬를 터줬다는 우려도 나온다.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은 "하위법령이 아니라 노란봉투법 개정이 필요하다"며 "모호함을 하위 법령으로 보충하겠다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은 "특정 대기업에서 벌어진 하나의 갈등이 노동3권 전체를 흔드는 빌미가 됐다"며 "위임 없는 시행령이 위헌은 맞지만, 그 결론이 '노조법을 고쳐서 축소하자'가 되어선 안 된다"고 재개정론을 경계했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과 권창준 차관. 연합뉴스메가특구 노동특례까지…양쪽에서 밀리는 노동권
여기에 메가특구특별법에 연구개발직 주 52시간제 적용 제외(화이트칼라 이그젬션),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 파견 허용업종 확대 등 노동규제 특례를 담는 방안까지 추진되면서 노동계의 반발은 더욱 커졌다.
부처 협의 과정에서 이 같은 특례가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지자 양대 노총은 지난달 31일 일제히 성명을 내고 "노동권을 제물삼은 첨단산업"(민주노총), "노동기준 후퇴 특구"(한국노총)라며 추진 중단을 촉구했다.
수백조원대 민간투자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파격적인 규제 특례가 필요하다는 정부 논리와, 특구에서 시작된 예외가 결국 전국적인 노동기준 후퇴로 이어질 수 있다는 노동계의 우려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이다.
결국 두 논란은 '메가프로젝트'라는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꼴이다. 한쪽에서는 투자 유치를 위해 노동규제를 풀려는 메가특구법이 추진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투자 계획이 노사 교섭·쟁의 대상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노란봉투법 하위법령 정비가 검토되고 있다.
노동계 입장에서는 메가프로젝트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한쪽에서는 노동규제를 풀고, 다른 한쪽에서는 노동쟁의의 범위를 좁히려 한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27년 만의 사회적 대화 복귀 움직임도 흔들
정부도 갈등을 풀기 위한 움직임에 나섰다. 김영훈 장관은 지난 주말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과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을 각각 비공개로 만나 노동계 의견을 반영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양대 노총도 예정했던 공동 기자회견을 잠정 연기하면서 일단 대화 가능성을 열어뒀다.
하지만 대화 채널은 아직 반쪽짜리다. 양대 노총이 공동성명을 통해 요청한 대통령 면담에 청와대는 아직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노정 갈등이 장기화할 경우 정부에도 부담이다. 민주노총은 1999년 노사정위원회 탈퇴 이후 27년 만에 새로운 사회적 교섭기구 구성을 검토하며 사회적 대화 복귀를 저울질하던 참이었다. 노동계 일각에서는 갈등이 격화할 경우 한국노총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이탈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모처럼 열리기 시작한 사회적 대화의 문이 메가프로젝트 속도전 때문에 다시 닫힐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결국 갈등의 출구는 대화에서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 노동계 관계자는 "특구가 가장 빨라도 2029년에나 가동되는 만큼 노동 특례는 급한 문제가 아니다"라며 "법안에서 떼어내 시간을 두고 별도로 대화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도 "주 52시간 예외 적용은 노동계 동의를 받을 때 가능한 문제"라며 숙고론을 편 바 있다.
정부가 메가특구법의 연내 제정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실제 특구 가동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다. 법안 처리의 '속도'와 노동계와의 '대화' 사이에서 접점을 찾는 것이 향후 노정 관계의 관건이 될 전망이다.
한 노동계 출신 여당 의원은 "그냥 밀어붙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며 "비상한 시기인 만큼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메가프로젝트의 속도를 높이려다 어렵게 열린 사회적 대화의 문까지 닫는 우를 피하려면, 노동 문제만큼은 '속도전'에서 한발 떼어놓을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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