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나는 일본 열도를 따라 걸으며 전쟁과 평화를 생각했다. 그리고 9월, 다시 유럽으로 건너갔다. 영국에서 시작해 파리와 바르셀로나, 로마를 거쳐 에든버러와 런던으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그 길 위에서 평화의 문제와 함께 내 마음을 오래 붙든 숙제가 하나 더 있었다. 저출산과 인구감소, 빈집과 빈터, 지방소멸과 수도권 집중이라는, 서로 얽히고설킨 대한민국의 문제였다. 그 답의 작은 실마리라도 찾고 싶어 런던 북쪽 하트퍼드셔의 작은 도시 레치워스(Letchworth)를 찾았다.
책에서 읽은 도시를 찾아가다
레치워스에 마음이 끌린 것은 『토지는 누구의 것인가』를 번역하면서부터였다. 레치워스는 1903년 건설이 시작된 세계 최초의 전원도시다. 산업혁명 이후 런던 같은 대도시가 급속히 팽창하면서 주택난과 과밀, 빈곤과 열악한 위생이 심각해지자, 에버니저 하워드는 1898년 펴낸 책(훗날 『내일의 전원도시』로 다시 출간)에서 도시와 농촌의 장점을 결합한 새로운 도시를 제안했다. 레치워스는 그 구상을 현실로 옮긴 첫 실험이었다.
그러나 레치워스의 의미는 녹지가 풍부한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주거와 일자리, 자연을 하나의 생활권 안에 두고, 도시가 발전하며 생겨나는 토지의 가치를 개인이 아니라 지역공동체가 함께 누리도록 설계했다는 데 더 깊은 의미가 있다. 번역 원고를 읽고 또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120여 년 전 영국 사람들이 시도한 이 실험 속에, 오늘 대한민국이 찾고 있는 지방시대의 단서가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책을 덮고 현장으로 갔다.
'세계 최초의 전원도시' 레치워스 가든시티(왼쪽)와 하워드 부인 기념관. 윤 교수 제공대한민국에는 정책이 부족했던가
레치워스의 거리를 걸으며 나는 오히려 대한민국을 더 많이 생각했다. 우리에게 지방을 살리려는 정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역대 정부마다 균형발전을 내걸었다. 행정수도 이전을 논의했고, 혁신도시를 세웠으며,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옮겼다. 기업 이전과 지역대학 육성, 귀농·귀촌과 청년 정착을 지원했고, 인구감소지역에는 막대한 재정을 쏟았다. 저출산 문제도 마찬가지다. 문제를 몰랐던 것도, 전문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정부와 연구기관이 내놓은 진단과 처방은 이미 차고 넘친다.
그런데도 큰 흐름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2019년 수도권 인구는 처음으로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어섰고, 사람과 자본, 교육과 일자리는 여전히 수도권을 향한다. 지방에서는 빈집과 빈터가 늘고, 농촌에서는 농사지을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 지방대학은 학생을, 작은 도시들은 존립 자체를 걱정한다. 반대편 수도권은 너무 몰린 사람들로 집값과 교통, 경쟁과 과밀을 걱정한다. 한쪽은 사람이 없어서, 다른 한쪽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문제다.
2025년 합계출산율은 0.80명으로 2년 연속 반등했지만,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다. 눈여겨볼 것은 지역별 차이다. 시군구별로 보면 전남 영광군이 1.79명으로 가장 높았고, 서울 관악구는 0.43명으로 가장 낮은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에서 아이가 가장 적게 태어나는 역설이다.
나는 이것들을 서로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방소멸과 수도권 과밀, 지방의 빈집과 서울의 아파트값, 그리고 저출산은 대한민국이라는 한 몸에 나타난 서로 다른 증상일 수 있다.
비료의 문제인가, 수종의 문제인가
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않으면 우리는 물을 더 주고 비료를 준다. 가지를 치고 지지대도 세운다. 그러나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그 땅과 기후에 맞지 않는 나무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때는 비료를 더 주기에 앞서 수종 자체를 다시 살펴야 한다.
우리의 국토정책도 이제 그런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닐까. 수도권 집값이 오르면 부동산 대책을, 지방에서 사람이 줄면 지방소멸 대책을, 아이가 태어나지 않으면 출산장려책을 내놓는 일은 저마다 필요하다. 그러나 증상마다 처방을 되풀이하는 동안, 사람과 돈과 기회가 수도권으로 흐르는 근본 구조는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다. 나는 그 새로운 수종을 찾고 싶어 레치워스까지 갔다.
그러나 레치워스에도 정답은 없었다
현장을 걸어 보니 레치워스를 완성된 성공 모델로 그리는 것 역시 옳지 않았다. 120여 년이 흐르는 동안 경제와 산업도, 사람들의 생활 방식도 달라졌다. 주택과 일자리, 청년과 지역경제라는 새로운 고민도 생겨났다. 오늘의 레치워스 역시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레치워스의 제도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또 하나의 모방에 그칠 수 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도시의 모양이 아니라, 대도시의 과밀과 토지 문제를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구조를 직접 실험했던 그 정신이다.
현장에서 눈여겨본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지역의 문제에 주민이 참여하는 구조다. 오늘날 레치워스에서는 1995년 의회 법률로 세워진 '레치워스 가든시티 헤리티지 재단'이 도시의 토지와 자산을 관리하며, 거기서 나오는 수익을 다시 지역사회를 위해 쓴다. 주민과 지역단체도 그 운영에 참여한다. 완전한 주민자치의 이상형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지역의 자산과 지역의 의사결정, 그리고 주민의 참여를 하나로 이으려는 원리만큼은 분명했다.
레치워스에서 만난 주민들과 함께(왼쪽), 주민들이 어울리는 도심의 한 마당. 윤 교수 제공토지는 누구의 것인가
레치워스의 원리를 곱씹으며 나는 오래된 말씀 하나를 떠올렸다. 구약성경 레위기 25장 23절이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고대 이스라엘은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에 팔린 땅을 본래의 가족에게 되돌려 주도록 했다. 땅은 결국 하나님의 것이고 사람은 그 땅에 잠시 머무는 나그네라는 고백이었으며, 땅이 몇몇 사람의 손에 영원히 쌓이지 않게 하려는 공동체의 지혜이기도 했다.
이 오래된 지혜는 근대에 다시 살아났다. 19세기 미국의 사상가 헨리 조지는 『진보와 빈곤』에서, 사회가 발전할수록 오르는 땅값이 소수에게 돌아가면서 진보 속에서 오히려 빈곤이 깊어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모세의 율법에서 토지 정의의 원형을 보았다. 하워드의 전원도시 구상도 이 문제의식에 깊이 기대고 있었다. 성경의 희년에서 헨리 조지로, 다시 하워드와 레치워스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토지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물음은 시대마다 새로운 얼굴로 되돌아왔다.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땅과 집은 오랫동안 부를 쌓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도로가 놓이고 지하철이 들어서고 공공기관이 옮겨 오면 땅값이 오른다. 그 가치는 공동체와 국가의 투자가 함께 만든 것이지만, 대개는 소수의 몫이 되었다. 사람과 돈이 수도권으로 몰리는 흐름의 밑바닥에도 이 구조가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유재산을 부정하자는 말이 아니다. 공동체가 함께 만든 가치를 어떻게 다시 공동체를 위해 쓸 것인가라는 물음을, 이제는 지방시대 논의의 한가운데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5극3특, 이제 중요한 것은 뿌리다
다행히 대한민국도 큰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현 정부가 추진하는 '5극3특' 국가균형성장 전략은 수도권 일극 체제를 넘어 여러 지역이 대한민국의 성장축이 되도록 국토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다. 수도권·동남권·대경권·중부권·호남권의 5대 초광역권과 강원·전북·제주의 3개 특별자치도를 중심으로 산업과 교통, 인재와 연구개발, 행정과 재정의 구조를 새롭게 엮으려는 구상이다.
나는 이 방향에 깊이 공감한다. 오랫동안 이어진 수도권 일극 집중을 그대로 둔 채 지방소멸만 해결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지방은 수도권의 지원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성장하는 국가발전의 축으로 서야 한다.
그러나 큰 나무를 새로 심는다고 저절로 숲이 되지는 않는다. 5극3특이라는 국토의 새 골격이 세워지더라도 그 혜택이 광역 거점도시에만 머문다면, 그것은 또 다른 집중을 낳을 수 있다. 초광역권 안의 중소도시와 농촌, 읍·면·동까지 사람이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이제 물어야 할 것은 5극3특이 필요한가가 아니라, 그 뿌리를 어디까지, 어떻게 내릴 것인가이다.
분권의 끝에는 주민자치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나는 지방분권과 주민자치를 다시 생각한다. 분권은 중앙정부가 가진 권한과 재원을 지방정부로 넘기는 일이다.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권한이 시·도청으로 내려오는 것만으로 지방시대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서울에 있던 권력이 광역 지방정부로 옮겨 오는 데서 멈춘다면, 그것은 행정의 분산일 수는 있어도 온전한 지방자치라 하기는 어렵다. 분권의 최종 목적지는 주민이어야 한다.
내가 40여 년 동안 주민자치를 강조해 온 까닭도 여기에 있다. 마을의 빈집을 어떻게 쓸 것인지, 묵은 농지를 어떻게 살릴 것인지, 아이 키우기 좋은 마을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지역의 문화와 자연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는 중앙정부보다 지방정부가 더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지방정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결국 그곳에서 살아가는 주민이다.
국가는 큰 틀을 세우고 지방정부에는 충분한 권한과 재원을 주되, 지역의 구체적인 문제는 주민이 토론하고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분권이 위에서 아래로 권한을 내려놓는 과정이라면, 주민자치는 아래에서부터 지역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다. 두 축이 만날 때 비로소 지방시대가 뿌리를 내린다.
레치워스에서 돌아오며
레치워스를 떠나 런던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다. 솔직히 고백하면, 그곳에서 대한민국 지방소멸의 정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나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는 이전보다 분명해졌다. 우리는 이미 지방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선언이나 교과서적인 대안이 아니라, 함께 붙들고 풀어 가야 할 물음들이다.
5극3특이라는 국가적 전환은 어떻게 주민의 삶에까지 닿을 수 있을까. 초광역 성장의 열매는 어떻게 중소도시와 농촌까지 흘러갈 수 있을까. 중앙에서 지방으로 내려간 권한은 어떻게 다시 주민에게 이어질 수 있을까. 그리고 지역의 토지와 자산에서 생겨나는 가치를 어떻게 지역에 남겨 다음 세대를 위해 쓸 수 있을까.
이 물음들의 답은 어느 한 사람, 어느 한 기관이 내놓을 수 없다. 빈집 몇 채를 고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빈집이 계속 생겨나는 구조를 바꾸는 일, 서울의 아파트값을 뒤쫓는 대책을 되풀이하는 대신 서울로 가지 않아도 자기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일은 정부와 지방정부, 연구자와 시민이 함께 풀어 가야 할 숙제다. 5극3특은 그 전환을 위한 중요한 골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골격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결국 지역이다. 그리고 지역의 주인은 행정기관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가는 주민이어야 한다.
레치워스에서 새로운 '수종'을 그대로 가져오지는 못했다. 대신 소중한 교훈 하나를 안고 돌아왔다. 바람직한 지방시대는 중앙정부가 만들어 지방에 내려 주는 완성품이 아니다. 국가가 길을 열고, 지방정부가 권한을 가지며, 마지막에는 주민 스스로 자기 지역의 미래를 결정하고 가꾸어 갈 때 비로소 완성된다. 땅이 결국 하나님의 것이라는 오래된 고백처럼, 지역 또한 그곳에서 대대로 살아갈 사람들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5극3특이라는 새 나무를 심기 시작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그 나무의 뿌리가 주민에게까지 닿게 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대한민국 지방시대를 꽃피우기 위해 우리 모두가 지금부터 더 깊이 연구하고 함께 실천해야 할 과제라고 믿는다.
레치워스 가든시티역에서 런던행 기차를 기다리며(왼쪽), 런던 웨스트민스터 국회의사당 앞에서. 윤 교수 제공- 윤재선 교수는 40여 년간 대학에서 지방행정학을 가르쳤으며, 현재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산천무지개교회에서 자비량 목회를 하며 동북아 평화공존 활동과 지역진흥 운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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