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2004년 개봉한 우리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는 폭력이 난무하던 1970년대 후반 교복 세대의 학교 현실을 조망하고 있다. 당시의 학교 폭력은 최근의 집단 괴롭힘이나 일진 폭력 등 사적 폭력이 아니라 국가와 학교에 의해 인정된 제도화된 폭력이었다. 교련과 선도부가 그 상징으로 영화에 등장한다. 특히 선도부장 종훈과 평범한 학생 현수 사이의 긴장은 이 영화의 큰 줄기이자 클라이맥스다. '건전한 교내 질서 확립'을 목적으로 하는 선도부장 종훈은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사실상의 '일진'이다. 모든 학생들이 종훈에게 고개를 숙였지만 현수는 저항했다. 종훈의 일방적인 승리가 예상되던 두 사람의 옥상 결투는 현수의 '선제 공격'과 '쌍절곤'이라는 비대칭 전략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끝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선도부장 종훈과 비슷한 처지가 됐다. '비핵 질서' 확립을 명분으로 눈엣가시 이란을 침공했지만 오히려 '호르무즈 해협 봉쇄'와 '드론 공격'이라는 이란의 반격에 발목 잡히며 별다른 소득 없이 휴전에 합의했다.
영화 속 옥상 결투의 무승부는 선도부장이자 일진인 종훈에게는 패배나 다름없다. 트럼프의 휴전 합의도 마찬가지다. 이란과 맺은 휴전 합의 양해각서 내용을 보면 미국의 패배가 더욱 뚜렷하다. 양해 각서의 총 14개 항목 가운데 미국만의 의무가 6개인 반면 이란은 3게다. 이란의 의무 3개 항목은 호르무즈 해협 60일간 무료 개방 및 해협 미래 관리 구상 협의, 핵무기 포기 방침 재확인 및 농축 우라늄 희석 처리, 현재 핵 프로그램 동결 등이다.
먼저 핵 문제와 관련해 이란은 지난 2015년 오바마 행정부와 맺은 포괄적 핵 합의(JCPOA) 수준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당시 합의에서 이란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핵무기를 추구, 개발 또는 획득하지 않을 것임을 재확인한다'고 이미 밝힌 바 있다. 또한 우라늄 농축도 15년 간 최대 3.67% 농도까지만 허용됐다. 이번 합의에서 이란에 부과된 핵무기 포기 방침의 재확인과 농도 60%인 농축 우라늄의 희석 처리는 JCPOA 내용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트럼프는 집권 1기 때인 지난 2018년 JCPOA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그러자 이란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 사찰을 거부하면서 핵 능력을 키워왔다. 현재 상태로 핵 프로그램을 동결해도 이란의 핵 능력은 과거 JCPOA 때보다 훨씬 고도화됐다.
호르무즈 해협 개방 문제는 이번 합의에서 오히려 악화됐다. 전쟁 이전에는 아무 비용 없이 자유롭게 항행하던 해협에 비용을 부과할 수 있는 근거를 주었기 때문이다. 해협 무료 개방을 '60일 동안'으로 한정하고 이후 해협 관리 시스템을 논의하도록 한 대목이다. 이란은 이 조항을 근거로 향후 비용을 부과하겠다고 거듭 밝혔다.
이처럼 이란의 의무 조항은 이란에게 전혀 부담이 없다.
미국의 의무 6개항도 이란에게 엄청난 혜택을 주는 내용이다. 호르무즈 해협 역봉쇄 즉시 해제와 인근 지역 미군 철수, 최소 3천 억 달러 상당의 이란 재건 계획 수립 및 관련 금융 거래 보장, 국제기구 및 미국의 대 이란 제재 해제, 추가 제재 및 미군 배치 금지, 이란 산 원유 수출 금지 해제, 이란 동결 자산 해제 등이다.
트럼프는 오바마 행정부가 JCPOA 합의에 따라 17억 달러 상당의 이란 동결 자산을 풀어준 것에 대해 '퍼주기'라고 비난해왔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이번 합의를 통해 최소 3천 억 달러를 이란에 쏟아붓기로 했다. 더구나 재제와 자산 동결도 본격적인 핵 협상이 아닌 휴전 협상 단계에서 풀어 버렸다. 미국 정부는 항상 이 두 문제를 핵 협상 결과와 연계해 왔다. JCPOA 합의 때도 그랬고 북한과 핵 협상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본격적인 핵 협상이 타결되기도 전에 제재도 풀고 동결 자산도 돌려주기로 약속했다. 휴전 협상 뒤 이어질 핵 협상에서 쓸 카드를 미리 써버린 셈이다. 최대 60일로 설정한 핵 협상(최종 합의)이 기한을 넘겨 지루하게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는 이유다.
'나쁜 합의'는 하지 않겠다며 JCPOA를 일방적으로 깨고 전쟁까지 벌였던 트럼프는 JCPOA만도 못한 휴전 합의를 했다. 이 과정에서 져야 할 부담은 동맹국들에게 전가할 낌새다. 그러나 원칙과 전략도 없고 신의도 없는 트럼프 행정부를 보고 이란 재건에 거액을 투자할 동맹국들이 과연 있을까? 트럼프 본인조차 단 10센트도 내지 않겠다고 하는 상황에서 동맹국들이 3천 억 달러를 댈 이유가 있을까?
눈 한번 부라리면 납작 엎드리던 미국의 권위도 이번 전쟁으로 사라져 버렸다. 평범한 현수에게조차 쩔쩔매던 선도부장 종훈의 권위처럼 말이다.
제도화된 폭력이 무너지면 학교는 평화로워졌을까? 지금 목도하듯이 제도화된 폭력은 다양한 사적 폭력으로 대체됐다. 미국 일극 체제의 붕괴와 무극 체제의 시작을 알리는 이란 전쟁이 한국에 주는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