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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일 역사작가 "배우 하영 증조부, 친일인명사전 미등재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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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요약

■ 방송 : CBS 라디오 <박성태의 뉴스쇼> FM 98.1 (07:00~09:00)
■ 진행 : 박성태 앵커
■ 대담 : 박광일 (역사 작가)

안상호, 한국인 최초의 일본인 의사
대정실업친목회 들어가려면 조선총독부와 관계 필요
고종 독살설 가능성 희박하게 보고 있어
친일인명사전 미등재 이유? 일상적 친일 행위해서
안상호, 추후에 친일명단 올라갈 가능성 있어
친일파 후손들, 책임지는 자세 필요



▶ 알립니다
* 인터뷰를 인용보도할 때는 프로그램명 'CBS라디오 <박성태의 뉴스쇼>'를 정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은 CBS에 있습니다.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박성태> 지금부터는 아주 옛날에 한 의사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최근 한 배우가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가족, 증조할아버지 얘기를 하다가 증조할아버지가 고종을 치료했던 의사였다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이분이 친일 논란이 거센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해당 배우도 결국 자필 사과문을 올리기까지 했습니다. 우리 친일 반민족 행위자에 대한 명단이 몇 개 단체에서 규정한 내용이 있는데요. 이분은 안상호라는 의사입니다. 이 의사는 이 명단에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그 행적은 친일 행적이 많았다는데 이걸 어떻게 우리가 봐야 될지 오늘 전문가 한 분을 모시고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하나하나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박광일 작가님이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박광일> 안녕하세요.
 
◇ 박성태> 먼저 이 질문부터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안상호라는 인물입니다. 앞서 제가 그냥 배우라고 했는데 많은 분들이 아시니까 배우 하영 씨가 본인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우리 증조부가 누구였어요라고 얘기했다가 갑자기 드러나게 된 겁니다.
 
◆ 박광일> 그렇습니다.
 
◇ 박성태> 증조부가 안상호라는 인물이고 이분이 고종을 치료도 했던 의사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입니까?
 
◆ 박광일> 역사학계에서는 약간의 주목과 약간의 논란은 있었지만 중요성의 관점에서는 조금 연구 대상에서 밀려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 사람을 다룬 논문도 하나 정도밖에 없을 정도라는 점에서 다른 여러 가지를 좀 모아야 이 사람의 어떤 삶을 좀 구성을 할 수가 있는데요. 1972년에 서울에서 태어났고 관립 일어학교 1회 졸업생입니다. 그리고 관비 유학을 통해서 일본으로 갔었는데 자혜병원 의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1902년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에서 의사로서 활동을 하기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서 당시 국내외에 가장 대표적으로 성공한 유학생의 사례로 소개가 되면서 그 이름이 그 당시에 많이 알려지게 되었고요.
 
◇ 박성태> 당시 신문에 그렇게 났다는 거죠.
 
◆ 박광일> 그렇죠. 그리고 유학생들 사이에 서로 회보를 만드는데 거기에 안상호라는 사람이 이렇게 일본에 가서 의사가 되었다, 이런 어떤 내용들이 소개가 되었고. 그 사람의 인생에 좀 큰 변화를 주었던 게 1906년에 러일 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일단은 관병식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서는 대한제국에서는 의친왕을 파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의친왕이 일본에 도착해서 아팠을 때 이 안상호가 치료를 하게 되면서 그때 인연을 맺게 되고요. 그때 일본 측 사무를 보았던 인물이 가와구치 이소코라고 하는 여성이었는데 이 사람하고 혼인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안상호의 부인은 일본인 가와구치 이소코라는 인물이 되는 거고요. 그러고 나서 이때 한국인으로서 일본에서 의사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의친왕이 약간 뭔가 호감을 가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황실로 들어와서, 대한제국 황실로 들어와서 전의,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예전에 드라마에서 보는 어의가 되어라라고 얘기를 했지만 그거는 좀 부담스럽다라고 해서 결국은 촉탁의라고 해서 외부에서 개업을 하고 그다음에 필요할 때 궁궐에 들어와서 업무를 보는 그런 방식의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고요. 그런 과정 속에서 1907년에 종로에 안상호 진료소를 개설하면서 국내에서는 최초로 개업을 한 서양 의사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1909년에는 같은 의사로서 독립운동가로 많이 평가받는 인물들이 몇 분 계신데 김필순 선생이나 박서양 선생, 이런 분들과 함께 콜레라 예방 활동을 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1910년에는 고종 치료 대가로 금화 300원을 받았다는 기록이 당시 신문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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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태> 일단 확인된 건 일본에 가서 공부를 했고 일본인과 결혼했고 고종을 담당했던 의사.
 
◆ 박광일> 촉탁의여서.
 
◇ 박성태> 촉탁의로.
 
◆ 박광일> 그래서 전의라는 설과 촉탁의라는 설이 있지만 이 사람을 다룬 논문에서는 촉탁의, 그러니까 외부에서 필요할 때 들어가서 치료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박성태> 물론 일본인과 결혼했다는 걸로 친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고.
 
◆ 박광일> 그렇습니다.
 
◇ 박성태> 그런데 여러 가지 행적에 친일 행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남아 있잖아요.
 
◆ 박광일> 그렇죠.
 
◇ 박성태> 어떤 것들입니까?
 
◆ 박광일> 그러니까 1910년 이전까지의 모습을 보면 성공한 개화인으로서의 모습만 드러나게 되는데요.
 
◇ 박성태> 일본에서 공부하고, 사실은 국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필요한 부분도 있을 수도 있습니다.
 
◆ 박광일> 그렇습니다. 그런데 1910년 이후의 모습들이 조금 눈에 띄는 부분들이 있는데 먼저 큰 딸을 당시 일본인이 다녔던 앵정소학교라는 곳에 보냈습니다. 당시 주요 친일파라고 할 수 있는 이완용이나 송병준, 이런 사람들이 전부 다 일본인 학교에 자신의 자식을 보냈었거든요. 그런 사례에 해당하는 것을 볼 수가 있고요. 무엇보다도 1916년에 대정친목회 회원으로 활동했다라는 명단이 발표됐는데 이 시기가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배울 때 무단통치 시기여서 한국 사람들의 어떠한 단체도 허락을 받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유일한 한국인 단체였으니까.
 
◇ 박성태> 대정실업친목회.
 
◆ 박광일> 친목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친목회에 들어가려면 일정하게 일본과 조선총독부와 관계가 없으면 그 단체 활동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런 면에서 좀 눈에 띄는 부분들이 있고요. 무엇보다도 1918년 12월 10일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인터뷰 기사가 눈에 띄는데요. 이때 완전히 내지화한 의사 안상호 씨 가정. 그래서 일선동화의 케이스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이 인터뷰를 하기에 나는 일본인이다. 그래서 매운 음식도 잘 먹지 못한다라고 표현을 하면서 자신이 마치 정체성이 일본인인 것처럼 드러내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라고 볼 수가 있고요. 이후에 일반적인 몇 개의 사실들이 조금 예를 들어 파주에서 토지 문제 소송, 그다음에 자신이 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산지기가 일본인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피살되는 사건이 안양 일대에서 있었고요. 그리고 1927년 12월 31일 사망을 하게 된 걸로 알려져 있는데.
 
◇ 박성태> 혹시 산지기, 지금 이 안상호가 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산지기가 일본인이었는데 피살됐다라고 얘기를 하셨는데 혹시 행적이나 이런 것과 관련해서 뭔가 의혹이 있는 부분, 그런 게 있습니까?
 
◆ 박광일>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당시 기록에 보면 일본인을 산지기로 둘 정도라고 한다 그러면 꽤 큰 땅과 권력을 갖고 있어야 될 거라는 추정만 가능할 것 같고요. 이제 이런 면에서 당시 이 사람이 처했던 위치는 일반 보통의 한국인들하고는 많이 달랐구나라는 것들을 충분히 알 수가 있는 거죠.
 
◇ 박성태> 예를 들어서 당시에 한국인들이 가입하기, 만들기 어려웠던 단체. 그렇지만 대정실업친목회는 허락이 된.
 
◆ 박광일> 그렇습니다.
 
◇ 박성태> 왜냐하면 친일 성향이 짙으니까 이렇게 추정할 수가 있는 거죠?
 박성태의 뉴스쇼 유튜브 영상 캡처박성태의 뉴스쇼 유튜브 영상 캡처
◆ 박광일> 그렇죠. 대정실업친목회는 명확하게 친일 단체입니다. 그러니까 그 친일 단체에 이름을 올렸다라는 거는 친일파라고 볼 수가 있고. 실제로 그 대정실업친목회의 회장이 조중응이라고 하는 인물인데 사실은 이완용, 송병준 등의 이름에 가려서 중요 친일파의 이름으로는 등장하지 않지만 정미칠적과 경술국적 모두에 이름을 올렸던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대신이었다라는 걸 알 수가 있는데. 나중에 이 대정실업친목회는 1921년에 약간 조직 개편을 하면서 그때 고문으로 이완용을 부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완용도 21년부터는 관여했던 단체라고 볼 수가 있는데요.
 
◇ 박성태> 여기에 평의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던데.
 
◆ 박광일> 그러니까 평의원이니까 일반 회원 정도의 느낌으로 참여를 했다라고 볼 수가 있는데. 처음에는 그냥 서로 친목도 도모하고 이름처럼, 그다음에 의사소통도 하고 그다음에 정신 수양도 한다라는 내용이었지만 나중에 결국 이 단체는 한국인과 일본의 융화를 내세운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거는 일본인이 한국 쪽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을 일본 쪽으로 끌어당긴다라는 걸 알 수가 있고. 그다음에 일본의 무단 통치에 순응하도록 유도하는 것, 즉 총독을 지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단체로 점차 그 정체성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앞에서 말씀드렸던 거의 유일한 1910년대 한국인 단체였지만 친일 단체였다라는 것들을 확인할 수가 있는 거죠.
 
◇ 박성태> 이 친일 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다음에 매일신보 인터뷰, 이게 조선총독부 기관지인데.
 
◆ 박광일> 그렇습니다.
 
◇ 박성태> 여기 인터뷰에서 내선일체의 한 사례로 소개됐다.
 
◆ 박광일> 그렇습니다.
 
◇ 박성태>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강권에 의해서 됐을 수도 있고 저희가 모르는 회색 지대들이 있을 수도 있는데.
 
◆ 박광일>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실제로 대정친목회의 평의원으로 들어간 부분은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매일신보의 기사와 연결해서 볼 때는 여기서는 본인이 직접 말을 했고요.
 
◇ 박성태> 그러니까요. 저도 그 말이 눈에 띄더라고요. 조선 옷은 입지 않는다. 이건 안상호가 직접 얘기한 부분이에요.
 
◆ 박광일> 사진도 일본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 박성태> 자녀들에게도 집에서 일본어만 쓰게 한다, 이런 말을 했다라는 거는 사실.
 
◆ 박광일> 우리가 보통의 한국인들이 생각할 수 없는 당시의 상황이라는 것들을 쉽게 짐작할 수 있고, 상당한 친일의 어떤 모습이 여기서 구체적으로 드러났구나라는 걸 알 수가 있는 거죠.
 
◇ 박성태> 알겠습니다. 이런 행적들을 친일로 사람들이 보고 있는.
 
◆ 박광일> 그렇습니다.
 
◇ 박성태> 그런 거고요. 독살설, 고종을 독살했다고. 왜냐하면 고종의 촉탁의, 앞서 말한. 어떻게 보면 말이 촉탁의지 주치의 같은 형태로 했는데.
 
◆ 박광일>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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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태> 그런데 고종의 독살설이 있었는데 일단 고종이 독살됐습니까?
 
◆ 박광일> 독살설이 2009년 전후에 연구를 통해서 한번 이렇게 발표돼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는 했습니다마는 후속 연구를 통해서 독살설의 가능성은 조금 희박하지 않을까,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1919년 1월달이 좀 중요한, 한국과 일본의 좀 중요한 상황이었는데. 바로 뭐냐 하면 아까 말씀드렸던 내선융화라는 것들의 상징적인 사건이 이 시기에 일어납니다. 바로 1월 25일날 영친왕과 우리가 알고 있는 이방자 여사의 혼인을 이 날짜로 결혼식 날짜를 정해놓은 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까 매일신보에서도 그런 사례들을 모으고 있었던 거예요. 한국과 일본이 서로 이렇게 뭔가 하나로 모이는 모습들을 그래서 안상호라는 사람 집을 방문했던 것도 그런 연장선상이거든요. 그런데 1월 21일날 고종이 승하를 하거든요. 그렇다면 이 일을 그때 벌여서 득을 볼 사람이 거의 없다라는 거고요. 여기에 대해서 한국 측과 일본 측이 모두 반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여기에 조금 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쪽은 일본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일본이 혼주라고 할 수 있는 이태왕, 고종을 독살할 가능성은 좀 희박한데. 문제는 윤치호 일기를 통해서 당시 염을 할 때, 그러니까 옷을 입힐 때 온몸이 퉁퉁 붓고 검은 반점이 있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기록이 한 1년 7개월 정도 지난 뒤에 전언, 전해서 들은 이야기고요. 당시 상황을 보면 조선총독부도 이 사건에 조금 우왕좌왕했다라는 느낌을 갖긴 합니다. 그래서 승하하고 염을 하는데 한 3일 정도 시간 차이가 나는데 그때 순종도 가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종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 상황을 당시 조선총독부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뭔가의 의문점들이 나중에 독살설로 확산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날 당일 불러서 안상호가 들어가게 되거든요. 그렇지만 이미 상황은 조금 끝나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볼 수가 있는 거죠.
 
◇ 박성태> 그러면 일단 독살 자체가 약간의 설이다.
 
◆ 박광일> 역사적으로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박성태> 왜냐하면 당시 일본이 말 그대로 내선일체를 하려고 영친왕, 그러니까 고종의 아들과 결혼시키려고 하는 마당에 굳이 시아버지를 독살시킬 이유가 있느냐. 이런 거죠.
 
◆ 박광일> 그렇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 독살설이 당시에 유효했다면 나중에 의친왕 같은 경우가 1919년 이후에도 안상호를 불러서 치료를 받거든요. 그렇다면 의친왕이 어떻게 안상호를 불러서 치료를 받았을까라는 것들을 생각해 보면 그 연루 문제도 조금은 거리가 있지 않을까, 이렇게 볼 수가 있는 거죠.
 
◇ 박성태> 알겠습니다. 현재까지 드러난 바로는 그거는 좀 사실관계가 아닐 것 같다라고 제가 짚어봤고요. 그런데 앞서 말씀하신 대로 안상호 씨가 여러 활동들을 봤을 때는 친일 행위를 한 것으로 충분히 추정이 되는데 친일인명사전이 있잖아요.
 
◆ 박광일> 그렇습니다.
 
◇ 박성태> 일단 위원회, 정부가 주도한 위원회에서 한번 펴낸 게 있고요. 그다음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별도로 펴낸 게 있습니다.
 
◆ 박광일> 그렇습니다.
 
◇ 박성태> 민족문화연구소는 4천여 명 넘게 이 사람들이 친일이에요라고 규정했어요.
 
◆ 박광일> 그렇죠.
 
◇ 박성태> 여기에는 안 올라갔죠?
 
◆ 박광일> 그렇죠.
 
◇ 박성태> 그건 어떻게 봐야 될까요?
 
◆ 박광일> 그러니까 정부와 그다음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주도해서 친일인명사전, 그다음에 친일 반민족 행위자 해갖고 각각 4천명 이상, 1천명 이상을 발표를 하고 정리를 했습니다. 역시 이력도 정리를 했는데 중요한 건 여기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들은 중요 친일파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올라가지 않았다고 그래서 친일파가 아니라는 것은 그거는 어떻게 보면 면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중요 친일파가 먼저 올라갔고 그다음에 다른 사람들은 그다음에 또 연구를 통해서 추가로 올라갈 가능성이 있는데 이때 안상호라는 인물이 여기에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지 않았던 이유는 당시 등재 근거가 구체적인 친일 행위가 있어야 된다라는 점이 하나가 있었고요. 두 번째는 조직의 간부여야 되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대정친목회에서 간부였다면 그 이름이 올라갔을 텐데 그런데 그게 평의원이었기 때문에 일반 회원의 개념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친일 행위를 했어야 되는데 그 친일 행위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일상적인 친일을 했다라는 거잖아요.
 
◇ 박성태> 예를 들어서 독립운동가를 고발한다거나 이런 식의 친일 행위 정도가 아니면 그냥 일본 총독부의 뭐랄까요. 좀 아첨하고.
 
◆ 박광일> 아첨하고 그다음에 거기에 한국인들을 끌고 가는 정도의 모습이었다면 그렇다면 친일파이긴 하지만 중요 친일파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는 점이 있어서. 그리고 또 한편으로 그 시기에 친일인명사전을 만들 때 반발이 굉장히 많았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명백한 사람들 중심으로 인명을 등재를 했습니다. 이제 그런 과정에서 일정하게 좀 빠져 있는데 이게 일부러 뺐다라기보다는 향후에 친일에 대한 연구가 조금 더 확산이 되면 그러면 충분히 올라갈 수 있는 상황이다라고 볼 수가 있는 거죠.
 
◇ 박성태> 사실 2005년이죠. 정부가 위원회를 만들고 여기서 친일 반민족 행위자 1006명을 규정했는데.
 
◆ 박광일> 그렇습니다.
 
◇ 박성태> 어떻게 보면 이 규정까지는 너무 명백해서 재산을 환수할 수 있는 대상인 거고.
 
◆ 박광일> 맞습니다.
 
◇ 박성태> 그 조금 뒤에 있는 사람들은 약간 다툼의 여지도 있고 이러면.
 
◆ 박광일> 일단은 배제를 시켜놓고 나중에 차후에 다시 연구하자, 이런 상황이었던 거죠.
 
◇ 박성태> 그렇죠. 그렇다고 해서 이분들이 그러면 친일이 아니냐?
 
◆ 박광일> 라는 거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전혀 다른 문제라고 볼 수가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친일과 관련해서 이런 친일 반민족 행위에 관한 그 기준과 그다음에 친일인명사전에 따른 기준에 따라서 그 기준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적용을 했을 때는 사실은 안상호도 거기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볼 수가 있고요. 이런 부분들은 어떤 면에서 보면 각각의 사회적 또는 개인적 영역에서 파악이 어렵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조금 더 자신의 가문과 그다음에 사회적인 어떤 그 공동체 안에서 확인해 보면 일정 정도는 인식이 가능한 부분이 있거든요. 그런 면에서 여기서 고민해야 될 부분은 친일파의 어떤 문제 그리고 보통 우리가 죄라고 평가를 하는 부분들은 당연히 그 벌로써 평가를 해야 되지만 그 공동체 안에서 이익을 받거나 또 때에 따라서는 그게 가족인 경우에는 책임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라는 겁니다.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 발췌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 발췌
◇ 박성태> 앞서 친일 명단으로 규정된 사람들은 죄를 받아야 되는 것이고.
 
◆ 박광일> 그렇죠. 죄에 따라서 벌을 받는 것이고 그런데 그 사람들은 당대에 물론 그 해당하는 것이지만 그래서 그렇게 만들어진 재산들은 환수를 하는 것이지만. 그렇지만 그 이후에 후손들이나 또 그 공동체에 속해 있던 사람들은 예를 들어서 거기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거죠. 그러니까 어떤 사회단체가 우리의 중요한 지도자 중에 한 명이 친일을 했다. 그럼 반성을 하는 게 맞잖아요. 그런 것들이 서로 비슷하지만 또 다른 영역인데 그거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벌을 받지 않았으니까 나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묻는 거하고는 좀 다른 영역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 박성태> 그렇네요. 쉽게 이해가 됩니다. 벌을 받을 정도는 명확하게 규정이 되고 드러나야 되니까.
 
◆ 박광일> 그렇습니다.
 
◇ 박성태> 그런데 혹시 덜 드러났거나 드러나지 않았거나 또는 그 정도가 조금 약하다면 일단 거기서 제외될 뿐이지 그렇다고 사회적 책임이 없느냐, 이건 아니다라는 말씀이죠.
 
◆ 박광일>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또 그것이 후손들에게 있어서는 때에 따라서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자기 가문을 살펴볼 수 있는 조금 뭔가 그 바탕이 되어야 될 거다라는 생각도 하게 되는 거고요.
 
◇ 박성태> 저도 기억이 납니다. 친일 반민족 행위자 명단을 만들 때 워낙 여러 언론에서도 또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는 목소리들도 있었기 때문에 갈등을 좀 최소화시키기 위해서 최소, 그냥 아주 나쁜 놈들만 일단 이름을 올린 거고.
 
◆ 박광일> 그렇죠. 중요 친일파라고 보시면 되죠.
 
◇ 박성태> 중요 친일파만 이름 올린 거고. 그래서 여기에 빠졌다고 해서 아닌 건 아닌 거고.
 
◆ 박광일> 그렇습니다.
 
◇ 박성태> 그렇다고 사실 그냥 다 하자니 예를 들어 동네에 조그마한 지주가 동네 일본 순사한테 잘 보이고 잘했다. 이걸 또 명단에 올릴 정도 되냐, 이런 여러 문제들이 있어서 일단은 좀 뺀 게 있었고. 그런데 작가님이 보시기에 안상호는 친일이라고 보시는군요.
 
◆ 박광일> 그럼요. 친일파의 대표 단체였었고, 그다음에 그 이후에 보여줬던 행적들을 서로 맞물려서 보면 그렇게 볼 수가 있고요. 무엇보다도 그 반대편을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은데, 당시에 독립운동을 한 번 하게 되면 학생들이 하게 되면 퇴학을 당합니다. 그럼 교육을 받지 못하게 되면 그러면 제대로 된 직장을 얻을 수가 없고요. 그러면 그 후손들 역시 제대로 된 사회적인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른바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인 거죠. 그러니까 그분들의 처지를 같이 병렬해 선상에서 놓고 생각해 보면 지금 안상호와 관련된 논쟁들이 어떤 시사점이 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거죠.
 
◇ 박성태> 사실 그때 저는 우리 역사의 가장 아픈 장면 중에 하나가 반민특위가 그냥 너무 허무하게 해산된 일. 그때 정리를 못했기 때문에 사실은 50년대, 60년대, 70년대 다 성공한 사람들이 다 친일로 돼서 또 그런 부류가 또 많기도 했고.
 
◆ 박광일> 그렇죠.
 
◇ 박성태> 그러다 보니 정당성도 오히려 성공한 사람들이 받지 못하고.
 
◆ 박광일> 그러다 보니까 그거를 시민사회에서 나서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게 친일인명사전이거든요. 그러니까 국가가 해야 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민사회에 그 과업이 떨어진 거고. 그것 때문에 또 그 안에서 또 벌어졌던 혼란스러움이 조금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나, 이렇게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 박성태> 누구는 떵떵거리고 사실 독립운동한 후손들은 어려운 형편에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 박광일> 그렇습니다.
 
◇ 박성태> 마지막으로 마무리 말씀 한 말씀 주시죠.
 
◆ 박광일> 그래서 역사를 배운다라고 하는 것들은 과거의 사실에만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내가 사회에서 어떤 책임을 져야 될지를 이해하는 것까지를 염두에 둔다라고 볼 수가 있고요. 이제 그런 점에서 그것이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서도 어떤 방식으로 적용해야 될지를 한 번 정도 생각하는 계기가 이번에 만들어지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박성태> 알겠습니다. 한 유명 연예인의 발언에서 비롯된 안상호 씨, 또 친일 논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지 박광일 역사 작가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 박광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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