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쿠스 형제 조각상. 이중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토지개혁을 추진하려다가 반대파들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기원전 로마에서 토지개혁을 추진하려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재선을 위한 호민관 선거에서 반대파들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여전히 호민관 직에 있었던 그는 신성불가침한 존재였지만, 투표가 진행되던 언덕에서 반대파들에 의해 무려 의자 다리로,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가 될 때까지 맞아 죽었다. 티베리우스를 비롯해 그의 지지자 수백 명은 전통적인 장례절차마저 금지된 채 무더기로 티베리스강에 버려졌다.
이 지경까지 간 원인은 쌍방의 벼랑 끝 적대였다. 티베리우스는 원로원 기득권층으로 대표되는 대농장 소유주들을 로마 민중의 적으로 선포하고 민회의 대표자로서 농지개혁법을 밀어붙였다. 이어 원로원의 이해를 대변하는 동료 호민관을 직책에서 자르기도 했다. 원로원은 자금을 끊는 방식으로 여기에 맞섰고 티베리우스가 대중의 인기를 바탕으로 로마의 왕이 되려 한다는 의심을 키웠다. 이 시기 티베리우스의 호민관 재선 도전은 원로원 입장에선 위험한 선언이었고, 제거의 명분이 됐다. 호민관은 한 번만 하는 게 그동안의 관례였기 때문이다.
로마 정치사에서 유혈이 낭자한 사건으로 꼽자면 빠지지 않을 비극은 그렇게 벌어졌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바닥이 나고 가진 카드를 모두 써버린 마당에서는, 결국 폭력만 정치의 수단으로 남게 된다. 티베리스강을 붉은 색으로 바꾼 그 날은, 극한의 정치 대결 속에 사는 이 시대 우리가 대치 상황의 끝단에 무엇이 있는지 우울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우리에게 평화로운 협상이 가능한 지대는 얼마나 남아있을까.
더 살펴볼 것은, 이 날 의자 다리나 곤봉을 휘두른 자들 역시 단순한 적대감만으로 상대를 때려죽인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을 이끈 원로원 강경파 나시카의 일성은 무려 "이 나라를 살리려는 이들은 나를 따르시오"였다. 최고신관의 옷까지 갖춰 입은 그는, 자신과 그 무리를 정의로운 세력이라 확신했다. 제왕적 권력을 잡아 위대한 공화정을 파괴하려는 자에 맞서기 위해 폭력은 불가피 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자신이 옳다는 확신은 얼마나 위험한가.
마지막으로 이 모든 비극의 과정은 '모스 마이오룸'이라는 금기가 사방에서 깨지며 진행됐다는 점도 살펴봐야 한다. '우리 조상의 관습'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모스 마이오룸은 로마인이 추구한 일종한 관습법이다. 호민관은 한 번만 한다든지, 선거가 행해지는 도시의 신성경계선 안에는 무기를 들고 갈 수 없다는 것이라든지, 유력한 가문에 대한 존중 같은 것들은 성문으로 정해지진 않았지만 전통적으로 존중됐던 일종의 전통, 관례, 도덕적 관념이었다. 이 역시 '헌정사 최초'라는 수식어가 달린 기사가 쏟아졌던 계엄, 그리고 그 이후 헌법재판관 지명과 대법원 판결까지 이어진 우리의 최근 상황과 겹친다.
티베리우스가 맞아죽던 날의 모스 마이오룸 파괴는 내란 정도였지만, 결국 내전을 불러일으켰고 로마 공화정을 끝냈으며 독재의 탄생으로 귀결됐다. 우리 사회는 이 과정 어디쯤에 있을까. 강력한 의지를 갖지 않는 이상, 규범이 파괴된 전례는 처음 시작된 곳에서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