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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청와대 도청하던 美, 정동영 발언에 발끈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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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4월 윌리엄 포터 전 주한미국대사가 미 CBS 방송에 출연해 '미국 정부가 박정희 청와대를 도청했었다'는 취지의 인터뷰를 했다. 한국 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박동진 당시 외무부장관은 주한미국대사 대리를 불러 해명을 강력히 요구했다. 집회가 철저히 통제되던 유신 말기 관변 단체가 주도하는 일종의 반미 집회까지 등장했다. 동아일보는 '청와대 도청 한미간 새 불씨' 제목의 기사를 톱뉴스로 실었다.
 
45년이 지난 2023년 4월 미 국방부 기밀 문서 수 백 건이 인터넷에 유출됐다. 이 문서 가운데는 미 정보기관이 윤석열 정부 용산 대통령실을 도감청한 듯한 문건도 포함됐다. 우크라이나에 155mm 포탄 33만발을 지원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곤혹스러워 하는 김성한 당시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외교비서관 간의 대화가 고스란히 담긴 문건이었다. 문건은 두 사람이 포탄을 폴란드로 우회해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는 대안을 논의한 내용도 담고 있었다. '톱시크리트'(극비문서), '시긴트'(도감청 등 신호획득정보)라는 비문 표시가 문건에 선명했다. 유출범은 비밀 접근 권한이 있던 미군 병사 잭 테세이라였다. 한국 내에서는 미국 정보기관이 한국 수뇌부를 여전히 도감청하고 있다는 의혹이 강하게 일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 때와 달리 윤석열 정부는 '다수 문건이 대부분 변조된 것'이라며 '따라서 미국에 요구할 사항도 없다'고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정작 테세이라는 재판에 넘겨져 유죄가 확정됐다. 그의 공소장에는 '문건을 위변조했다'는 내용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포탄도 문건 내용대로 폴란드를 우회해 우크라이나에 지원됐다.
 
용산 대통령실.용산 대통령실.
1996년 9월 강릉에 북한의 잠수함이 침투해 무장공비가 상륙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주미 한국대사관의 해군 무관으로 근무하던 백동일 대령은 미 해군정보국의 정보분석관에게 관련 정보를 요청했다. 공식 채널로는 정보 교류에 한계를 느껴오던 백 대령이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김에게 북 잠수함 관련 정보를 부탁한 것이다. 짐작처럼 미국은 북한 잠수함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간의 교류를 주시하던 미국 정부는 로버트 김을 간첩죄로 체포했고 외교관 신분이던 백 대령을 사실상 '비우호적 인물'로 지목해 미국을 떠나도록 했다. 백 대령은 귀국 뒤 끝내 군복을 벗었고 로버트 김도 7년 넘게 옥살이했다. '영국과 호주 등에게는 제공되는 북한 관련 정보가 정작 한국에는 제공되지 않는 것이 타당하냐'는 비판이 한국과 미 한인 사회에서 강하게 일기도 했다. 한국 정부도 국내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무기 중개상을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체포해 로버트 김 구명 카드로 활용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강력한 항의와 법원의 집행유예 석방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24년 7월 미 연방 검찰이 주미 한국 대사관에 파견된 한국의 전현직 국가정보원 직원들의 실명과 활동 내용을 이례적으로 공개했다. 미국의 외교 안보 싱크탱크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해온 한국계 미국인 수미 테리에게 금품을 제공하며 정보 활동을 벌였다는 것. 수미 테리는 외국 정부로부터 지시나 금품을 받고 대리 활동을 하려면 미 법무부에 대리인 등록을 해야 한다는 '외국대리인등록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는데, 미국 검찰이 그의 공소장에 한국 국정원 직원들의 신상 등을 모두 까발렸다. 미국 정부의 기밀 정보를 빼낸 것도 아니고 외교·안보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고 한국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는 공공외교조차 형식적 법률 위반을 이유로 가로막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는 지적이 미국 내에서도 나왔다. 수미 테리 사건을 계기로 미국 정부는 주미 대사관에 파견되는 국정원 직원에 대한 비자 심사를 강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권을 가리지 않고 한국 정부에 우호적이던 미국 내 한국 관련 네트워크도 위축됐다.
 
지난달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 현안질의에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출석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지난달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 현안질의에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출석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
최근 한미간 '정보 갈등'이 문제시되고 있다. 국민의힘 등 보수층에서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미국으로부터 받은 북한 구성 우라늄 농축시설 정보를 공개한 발언이 화근이었다며 한미 동맹을 위해서는 정 장관을 파면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나아가 자주파로 불리는 이종석 국정원장의 사퇴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 장관은 구성 시설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정보가 아니라 이전부터 학계 등에서 언급해온 내용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그러면서 국민의힘 파면 요구를 '색깔론'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한미간의 정보 갈등은 한미 동맹 내내 끊인 적이 없었다. 아무리 동맹 관계라도 한 나라가 아닌 이상 국익이 다를 수밖에 없다. 각자의 국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정보 경쟁은 필연적이다. 동맹국이 정보를 주기만을 기다린다면 정보 예속에 다름 아니다. 동맹 사이에 무슨 정보전이냐고 힐난하는 것 자체가 순진한 생각이다. 미국이 도덕적, 외교적 비난을 감수하면서 중국은 물론 한국과 독일 등 핵심 동맹국의 수뇌부까지 도감청해왔다는 의혹과 동맹국의 공공외교도 걸고 넘어지는 행태는 국익 추구를 위한 정보전의 현실을 보여준다. 정보전에서 동맹 여부나 기밀 여부는 국익보다 후순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재명 대통령은 13일 국무회의에서 "국가 간에는 이견이 있기 마련"이라며 "이견 존재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견을 관리 가능한 범위 안에 두려는 조정 노력이 필요하지만 국익이 다른 만큼 이견이 없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국가 간 관계에서 굴종적, 사대적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익보다 동맹을 무조건 추종하는 풍조에 곱씹어 볼 만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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