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악 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오른쪽), 위철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직무대행이 23일 국회에서 열린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사태 등 국민참정권 침해 진상규명 및 선거관리 개혁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회의에 출석해 질의를 듣고 있다. 황진환 기자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투표용지 부족 사태 당시 검토했던 재투표 가능성은 각 관할선거구 선거관리위원회가 당선인을 발표하면서 일단락된 사안이다. 다만 각 관할선거구 선관위가 재투표 가능성 등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관성적으로 당선인을 발표해 버렸다면, 향후 법정에서 다툼의 소지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4일 중앙선관위 등에 따르면, 중앙선관위 법제국 해석과는 제9회 지방선거일이었던 지난 3일 '투표용지 부족에 따른 선거연기 사유 해당 여부 등 정리' 문서를 작성했다.
법제국 해석과는 이 문서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해 "재투표 사유 해당"이라며 "재투표 사유는 '천재·지변 기타 부득이한 사유로 인하여 어느 투표구의 투표를 실시하지 못한 때와 투표함의 분실·멸실 등의 사유가 발생한 때'"라고 적었다.
이어 "'어느 투표구의 투표를 실시하지 못한 때'란 하나 또는 여러 투표구 내의 모든 투표자가 투표를 하지 못한 경우뿐만 아니라 그중 일부의 투표권자가 투표를 행하지 못한 경우를 포함"한다며 "투표용지 부족으로 투표를 하지 못한 선거인이 있으므로 '기타 부득이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음"이라고 명시했다.
지난 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법제국 해석과에서 작성한 '투표용지 부족에 따른 선거연기 사유 해당 여부 등 정리' 문서 내용 중 일부. AI 이미지로 재구성. 재투표는 유권자가 다시 투표를 진행하는 절차고, 재선거는 선거 자체를 무효로 하고 후보자 등록부터 투표까지의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해당 문서에서 해석과는 용지 부족 사태가 재선거 사유 등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공직선거법상 재선거 사유에는 선거구의 후보자가 없는 때나 선거의 전부무효 판결 또는 결정이 있을 때 등인데, 이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제국 해석과는 이 문서를 지난 4일 중앙선관위에 보고했다. 중앙선관위가 투표용지 사태 발생 직후 재투표 가능성을 인지했던 대목이다.
그간 중앙선관위는 재선거 가능성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재투표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힌 바 없다.
문제는 재투표 결정은 각 지역 선관위가 당선인 발표를 하기 전에 이뤄져야 하는 절차라는 점이다. 즉, 지역 선관위가 당선인을 발표하는 순간 재투표는 하지 않기로 결정된 것이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당선인이 결정된 이상 재투표는 실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재투표 여부 문제는 이미 끝난 사안이라는 것이다.
재투표 문제는 이미 종결된 사안이지만, 향후 재선거 등 선거소청을 다투는 법정에서 새로운 변수로 떠오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만약 각 지역 선관위가 충분한 검토 없이 당선인을 발표함으로써 재투표 가능성을 조기에 제거했다면, 이를 문제 삼아 재선거를 주장할 여지도 생기기 때문이다.
가령, 당선인을 가장 늦게 발표한 서울시선관위는 재투표 문제를 검토했는지를 묻는 CBS노컷뉴스의 질문에 중앙선관위의 입장을 참고해 결정했다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서울시선관위 관계자는 "선거연기도 '천재·지변 기타 부득이한 사유로 인하여 선거를 못하는 경우'에 하도록 공직선거법에 정해져 있는데, 중앙선관위는 지난 4일 투표용지 부족을 '선거연기 사유가 아니'라고 발표했다"며 "선거연기 불가 사유와 마찬가지로 서울시선관위는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기타 부득이한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답했다.
그러나 중앙선관위가 이번 사태를 선거연기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근거는 서울시선관위의 설명과 다소 차이가 있다.
법제국 해석과가 만든 '투표용지 부족에 따른 선거연기 사유 해당 여부 등 정리'에는 선거연기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이유로 "'천재·지변 기타 부득이한 사유로 인하여 선거를 실시할 수 없거나 실시하지 못한 때'이나, 선거를 이미 실시하였으므로 선거연기 사유에 해당하지 않음"이라고 적혀 있다. 이미 선거가 실시됐으니, 연기할 수 없다는 취지다.
공직선거법에 정통한 서울 소재 법률전문대학원 A교수는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충분히 '기타 부득이한 사유'로 볼 수 있다"며 "결정을 선관위가 스스로 내리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재투표를 하지 않고 싶어 할 주체인 선관위가 직접 재투표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것 자체에 법률상 흠결이 있다"며 "제3자가 재투표에 대해 감시할 수 있는 기관을 두거나 재투표에 대한 이의제기 절차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재투표 사유에 해당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향후 소송 과정에서 중요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선거인이나 후보자, 후보자를 추천한 정당 등이 선거 직후 14일 이내 각 관할선거구 선관위원장에게 선거소청을 제기할 수 있다. 선거소청은 투표나 개표, 선거 관리 과정에서 위법한 행위가 있었거나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만한 중대한 하자가 발생했을 때 해당 선거의 효력이나 당선인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법적 구제 절차다. 소청 접수 이후 중앙선관위와 각 시·도선관위는 60일 이내 결정을 내려야 하며, 기각·각하 결정에 이의가 있을 경우 법원에서 판단하게 된다.
지난 19일까지 선거소청은 총 690건이 접수됐다. 중앙선관위에는 총 275건이 접수됐는데, 시·도지사 127건, 교육감 67건, 비례대표 시·도의원 60건, 세종시의원 6건, 선거 불특정 15건이다. 그중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겪은 서울시장 선거에 대한 소청은 30건으로 집계됐다.
시·도선관위에 접수된 415건은 구·시·군의 장 122건, 지역구 구·시·군의원 110건, 지역구 시·도의원 109건, 비례대표 구·시·군의원 64건, 선거 불특정 10건이다.